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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May 10. 2019

감정에 대한 인식과 실존

겪어보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확실하다고 할 수 없다.

 나 같은 몸은 더위나 추위나 고통을 느끼게끔 하느님의 뜻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까닭은 우리에게 밝혀지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한도가 있다. ‘무엇인가’하는 이상을 묻지 마라. 만약 너희들이 모든 것을 안다면,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낳을 필요도 없었다.... 그것이 채워지지 않은 채 영원히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이름을 들면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 스승은 여기서 고개를 숙이고 난처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Durante degil alighieri <신곡>

 자신의 생각에 갇힌 채 세상을 향한 통로를 열어두지 않는 사람은 불행하다. 불행은 은폐하는 자의 침묵이고 존중은 결여되어 있다. 이런 사람은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자신의 일부를 타인에게 밝히거나 또는 가식적으로만 행동해야 하기 때문에 허구적인 충만감을 영위한다. 진정성이 결여된 채 느껴지는 따스함으로 구성된 자아의 본래성을 거짓으로 밝힌다. 함께 있어도 외로운 이유는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이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나 외로움을 느낀다.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향유하는 대상 속에서 이미 본래적인 고유함을 찾은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왜 외로운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단테의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예컨대, 팔에 상처가 나면 그 부위에서 따끔거리거나 화끈거리는 등의 느낌을 받는다거나, 자신에게 감동을 주거나 또는 상실감으로 인해 눈시울이 붉어지거나, 아니면 내가 전혀 의도하지 못했는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에서 웃게 되는 등, 감정적인 부분이 결여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느낄만한-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하는-감정들은 발생론적 관점에서 인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왜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다. 언제였을지 모를 이 세계의 시원부터 이미 감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물음의 전제들로 이 세계의 공리이다. 즉 이 원인에 대해서 말해지려면 또 최초의 원인인 '신'에게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다.


 공리들에 관심을 쏟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일 수 있다. 알 수만 있다면 알고 싶지만 알 수 없을뿐더러, 한 편으로는 이 곳이 인간의 지성 수준에서 알아서는 안 되는 금지된 영역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나의 사고와 느낌들을 면밀히 주시하고 이를 상징적인 기호로 옮겨 놓는 것이 전부이다. 이것이 철학이라면 철학이다. 비단 철학이라는 학문에 의한 것이 아닌 인간 존재의 무한 지성이란 한계선이 명확한 지점에 대한 앎, 다시 말해 원인을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경계까지의 접근이다. 더 이상 말 해질 수 없는 지점 그리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상황과 그 상황에 의해 발생하는 사고의 변화 그리고 나 자신을 정직하게 대했을 때 밝혀지는 감정 양태이다. 연결된 체계에서 보편적 체계를 찾아내는 것이 인간과 세계의 실존성에 대한 총체적 답변이다. 하지만 이 이상을 알려고 하는 자는 고개를 숙이고 난처한 듯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구축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앎인 '인식'이 전부가 아니다. 자신의 사유 속의 인식들은 내면성과의 실존을 구축해야 한다. 인식이 인식으로 머무름으로 해서 문제시되는 것은 '나'의 결여이다. 발견 가능하긴 하지만 나와는 전혀 무관하게만 여겨지는 사유는 끊임없이 의심을 반복하고 결과를 번복하면서 주어진 상상을 해체하기를 시도한다. 확증성의 결여는 모호함이다. 그리고 이것의 극복 방안은 현실의 체험이다. 만약 슬픔을 알려고 한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슬퍼지는 것이다. 아무리 슬픔에 대해 보고 듣는다고 한들 내 두 눈에서 직접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내는 것만큼 슬픔을 잘 아는 방법은 없다. 니체가 고독을 알기 위해 자발적으로 고독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이유도 '고독'을 대상으로서가 아닌 '나'로서 체험하기 위해서이다. 이게 현상학에서 말하는 '사태 자체로'라는 구호의 의미가 아닐까. 철학자로 산다는 건 어쩌면 불행에 근접해 있다. 불행에 대해 알려면 자기 자신이 불행해져야 하기 때문에 몸소 자신의 삶을 희생하겠지만, 도대체 이것은 무엇을 위한 일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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