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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Apr 30. 2019

생각 비우기의 함정

욕망의 은폐와 폐기의 불가능성

 삶은 허상과도 같다. '살아 있음.'이라는 실존의 상태는 '무엇을 위해서'라는 물음으로 항시 대체된다. 삶은 어떤 개인적 가치를 영위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꾸준히 던진다. 이것에 대한 답변은 나름대로이다. 하지만 그런 답들이 가치를 표방하고 있다 하더라도 '살아간다.'는 말은 그리 특별한 지위를 인간에게 부여하지 않는다. 어차피 우리는 최소한 100년 안에는 모두 죽기 때문이다. 유한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기도 하지만 유한하기 때문에 영원한 것을 원한다. 하지만 삶은 영원하지 않다. 의학 기술 덕택에 삶의 질이 연장되었지만 '영원'이라는 시간 앞에서 그 어떤 시간의 간격도 한 점으로 축소된다. 만약 영원하기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불가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불가능성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 무지함이 자신을 절망 속으로 밀어 넣고 있을 것이다. 이 곳에서 맛보는 절망감은 온전히 자기 자신의 몫이다.


 가끔 길을 걷다가도 문득 이런 생각이 솟아오르면서 지금 마주하고 있는 세상을 무료하게 만든다. 허무주의를 받아들인 자의 말로는 어차피 허무로 끝이 나겠지만, 코기토(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다.)적이면서도 이를 온몸에 두르고 있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인간의 정신이 자주적으로 싫어하는 것들을 꾸준히 혐오의 대상으로 지정하면서 자기규정 외부로 밀어내고 있다면, 이런 심적 운동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는 '이것이 옳다!'라고 은연중에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인가? 프로이트의 '죽음 충동'은 프로이트 본인의 마음 상태를 반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죽고 싶어 하는 욕망을 은밀하게 간직하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논리는 논란의 중심이 되었지만, 그의 '무의식' 개념이 쇼펜하우어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니 만큼,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 쇼펜하우어가 가장 완성된 인격으로 보았던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서 손가락을 꼼짝거린다거나 다리를 떨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의지를 폐기시켜야만이 진정한 안식을 찾을 수 있다고 그의 입장, <의지와 표상의 세계>의 한 절에서는 오죽하면 자살을 긍정할 정도이겠는가? 프로이트의 의식의 근저에는 생명의 존엄은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는 객관적인 사실이 있었을 뿐이었거나, 아니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어 한다는 욕망의 은유법이었으리라.


 자유롭고 싶다고 원하는 상태에는 이미 억압이 전제되어 있다. 인간이 자유롭기를 욕망한다는 것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항상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은 생각하는 데로 살아간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움직인다.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실현시킬 수조차 없다. 그래서 욕망의 실현은 자유의 조건이다. 그런데 생각하지 않거나 아니면 생각이 없다는 말은 욕망이 없다는 뜻이고 그것은 죽은 상태와 마찬가지이다. 죽음이란 생기가 없는 것, 생동감을 잃은 상태이다. 그리고 죽음으로서 안식을 얻게 된다는 건 인간 존재를 옭아 매고 있었던 자신의 생각 속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찌 보면 일종의 구원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 죽음이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는 건 불교에서의 가르침과 같다. 즉 욕망을 버리라는 것은 의식 속에 존재를 옭아 메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인간이 교의적인 말을 실천할 수 있는지가 문제라는 것이다. 단언하자면 욕망을 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 사고방식이 실패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은 인간은 또한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견딜 수 없어하기 때문이다. 존재는 공허함을 싫어한다. 공허는 특별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 감정은 일상적이다.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허는 어떤 사람이든 간에 심심함을 느낀다. 항상 어떤 자극 그리고 그것이 새로우면 더욱 좋은 그런 사건들을 원한다. 


 삶이란 생각이라는 파도를 견디는 시간이다. 그리고 이 생각의 실현이 인간 존재의 행복을 위한 전제이다. '생각한 대로의 삶'이라는 슬로건은 모두에게 꽤 이상적인 방향성이다. 하지만 이것에 대립되는-통념으로만 이해되는-'현실적 조건'의 반향은 이 말을 뿌리째 흔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나 생각대로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는 말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인간의 노력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비워내는 시도에서가 아닌 자기 자신을 성취하는 곳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행복은 성취다. 행복은 만족된 영혼 안에 있는 것이지, 자신의 욕구들을 뿌리째 뽑아 버린 영혼 안에, 거세당한 영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삶이 행복이기 때문에 삶은 개인적이다. 개인의 개인성, 즉 자아의 자기성은 원자와 개체의 특수성 이상의 것이다.
                                                                             Emmaneul Levinas. <전체성과 무한> 

 쓸 데 없이 생각을 한 번 비워보기로 했는데 실패했다.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여태껏 가치 있다고 믿어왔던 것들을 잠시나마 쓸 데 없는 일이라 치부할 수는 있었다. 이를 위한 특별한 계기가 있어 어려운 과정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것은 마음을 텅 비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비워진 것을 성취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욕망하는 대상을 버린 것이지 욕망 자체를 버린 것이 아니다. 평소에 하던 생각을 비워내니 그 생각 말고 다른 것들을 원한다는 게 참 역설적이었다. 티베트 수도원에 가면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 이걸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만나 보고 싶다. 그런데 그 사람이 성공했다고 말하더라도 진정한 성공인지에 대한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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