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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Apr 13. 2019

타인을 이해한다는 오만함에 대하여

스스로를 포기해야만이 누군가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조언이나 충고를 하게 될 때 종종 말해지는 방식은 '내 입장에서' 아니면 '나 같으면'이라는 형식이다. 이 형식적인 틀에 갖춰져 는 함의는 이미 나의 기준에서 남에게 발생한 일을 판단한다는 것이며, 자신의 옳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당연한 일이다. 어느 누구나 자신의 입장-거창하게 표현하면 내면의 근거지어진 것들-을 토대로 모든 것들을 판단한다. 그래서 모든 것들은 주관적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을 타인에게 들이미는 것이 타인을 위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을까? 대화 속에서 타인의 요청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선행해야할 조건이 있다면 나 자신의 어떤 근거들도 제시하지 않는 것이다.


 현상학적인 관점에서 개인은 완전히 고립된 존재이다. 어떤 현상의 베일에 가려진 인간 존재는 현상의 배후를 절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주관적으로만 이해되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성한다. 즉 내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나의 현상이고 타인과의 만남은 나의 현상의 하부에 위치한 타인의 현상이다. 우리가 언어를 이용해서 어떤 대상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성취하지만, 정작 이해하는 것은 주관적인 느낌들일 뿐이지, 어떤 대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혀낼 수 없다. 즉 시선 아래에 놓여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는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참이라고 믿는 정당화된 지식들인 이론이나 법칙과 같은 객관성은 보편타당함을 제시하지만,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찬동을 얻어낸 주관적인 입장이다. 타인도 마찬가지로 주관적으로만 이해된다. 타인은 완벽한 타인이다. 만약 서로 통한다고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상호주관적인 이해이지, 그 이상을 향유할 수 없다는 것이 감각의 세계에 자리한 인간의 지각 수준의 한계이다. 헉슬리의 글은 이런 입장을 잘 보여준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서로 껴안으며 서로의 황홀한 느낌을 하나의 자기초월상태로 합쳐 보려고 하나 헛된 일이다. 육신을 가진 영혼의 운명은 본질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홀로 겪도록 되어 있다. 감각, 느낌, 통찰, 환상 같은 것들은 모두 개인적인 것이며, 상징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달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경험에 대한 정보를 경험할 수는 있지만, 경험 그 자체를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 Aldous Huxley < 멋진 신세계 > -


 발췌한 내용처럼 이것도 어느 정도 대중성을 띤 헉슬리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앎의 허무함 속에서 유일하게 이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은 이런 보편적으로 연역이 가능한 것들이라 여겨진다. 경험은 오로지 순전히 자신의 경험이고 누군가와 동일한 대상을 경험했다고 손 치더라도 나의 입에서 말해지는 것은 경험 자체가 아닌 그에 대한 느낌들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대화를 함으로써 공유되어지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나의 편협함에 대한 극복이다. 한 개별 존재의 인식은 협소하다. 살아 있는 어느 누군가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이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수준은 다원성의 차원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정도이다. 그래서 타자와의 조우,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으로 이해된다. 만남은 사유의 지평이 넓어지는 의미작용이다.


 이런 현상학적 견해를 바탕으로 타인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 속에 입점한다. '이해'라는 사고 행위에는 이미 배려함의 양태가 존재한다. 고전 경제학의 논리로 인간이 오직 이기적으로만 행동하는 주체라면 굳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고 귀를 통해 들어오는 정보들을 처리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어느 정도의 연민을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타인을 위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데로 타인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판단은 자신의 틀 내에서 이루어진다. 만약에 타인을 이해해야 할 상황이라면 그 순간만큼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일시적인 폐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나의 것들이 타인에게도 온전히 수용된다는 믿음은 자신이 우월한 형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잠시나마 타인이 되어야 한다는 불가능한 일을 실현해서 타자의 사건을 판단해야 한다.


 타인은 완벽하게 타인으로서만 존재한다. 인간이 소우주와 같다는 신비한 은유는 인간의 존재가 신비로움으로 가득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또한 각자가 각각의 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인간'이라는 동일한 종의 범주로 이해되지만 다채로운 자아로 행위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렇듯 같은 경험을 했음에도 자신의 느낌만을 순전히 이해하게 되는데, 타인의 직접적인 사건을 타인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나는 너를 충분히 이해해.'라는 말은 얼마나 오만한 발언인가? 물론, 굳이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군가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은 나의 믿음의 체계에 의도하지 않았던 침해를 받을 여지도 충분히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인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신의 속사정을 드러내는 것은 정말 그 사람이 몰라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행위의 주인이기도 하면서 생각과 행위에 휘둘리기도 하는, 자기 자신에게 이질적인 타자가 될 수도 있다. 누군가 자신의 아픔이나 슬픔을 꺼내면서 듣는이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것이 전부라고 여겨진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이 수용하지 못하는 부분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은 수용할 수 있도록 고민하는 것, 수용되지 않는 부분들은 어쩌면 침묵해야 할 수도 있는 것, 끊임없이 스스로의 변전을 요구하는 사고 행위가 타자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다. 타인에게 관대해지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엄격하게 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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