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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Apr 03. 2019

참을 수 없는 가벼운 관계

피상적인 관계의 지속 불가능성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갖는다. 이 내면의 형식은 그 자체로 우상화되어 있다. 이것은-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한 개인의 존재 방식으로서, 인간은 한 개인의 역사 속에서 생성된 기억을 토대로 자기를 향유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인간은 사회적이어야 한다는 규정 내에서 자신을 찾을 수 있다. 고독한 자아는 무규정적인 상태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나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고독으로 인한 불합리성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은 타자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부차적인 욕구를 수행하게 된다.


 인간의 고독이 시작된 발원은 유아기적의 무기력함 속에서이다. 과거의 사건이 현재보다 오래된 시점에서 발생한 단순한 일이 아닌 지금 이 순간까지 끊임없이 제약을 거는 현사실적인 기호라면,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유아기적 시절에 겪는 분리의 경험은 평생 동안 지배적인 정서로 작용한다. 어린 시절에 겪게 되는 정서를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유아의 인간은 자기 자신과 어머니를 동일시한다. 다시 말해, 거울에 비친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 을 자신의 모습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인간 시각체계가 다른 감각적 체계보다 선행한다는 것과 현상적 해석이 인식보다 우위를 차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아이가 성장 후, 의지대로 팔과 다리를 움직이면서 자유를 얻게 되지만 잃게 되는 것은 어머니와의 일체감이다. 이때 최초로 자기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인지하면서 고독을 느끼게 된다.


 너무 어릴 때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이론적으로 그렇다고 한다. 위 내용을 바탕으로 했을 때 고독함이 개인들의 삶에 지배적인 정서로 자리해 있다면, 인간은 자유를 열망하면서도 외로움에 취약한 모순적인 존재로 이해된다. 고독은 자유를 선사하지만 이 자유에서 주관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사적인 긍정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타자와의 결합을 끊임없이 꾀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런 경향의 개인에게 일치의 경험은 고독으로 인한 불안이나 무기력을 해소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이다. 그런데 인간은 모두 다르다. 거울에 비친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무한한 애정을 아낌없이 주는 존재이다.(아닌 경우가 때때로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완벽하다고 치부될만하지만 완벽함이 주관적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곳은 사회이고, 타인은 어머니가 아니다. 개별 존재들이 삶을 영위하는 '사회'는 개인들의 이해관계가 끊임없이 상충하는 영역으로서 불일치를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게 모든 개개인들은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유일한 것과 충돌하는 영역은 인간관계로서 어떤 특별함을 온전히 수하지도 않으면서 완전한 융합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불일치를 형성하는 인간관계는 불안의 근원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독을 해소하기 위해서 인간은 타인과의 만남을 도모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살아온 두 타자 간에 일치를 꾀하기란 쉽지 않다.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만남에 대해 소극적으로 변하는 이유는 타자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고 어느 정도로 이해하는 데에도 꽤 어려움을 겪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된 만남에 더욱 집중한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를 잘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정'이라는 결속으로 다져질 수 있는 관계란 지금까지도 지속적인 만남을 이행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기대를 넘어서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만남의 지속을 위해 선행하는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꾸준한 '일치'의 경험이다. 다음은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에 나온 구절이다.

 우정이란 기억력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인간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임을, 과거를 기억하고 항상 지니고 다니는 것은 아마도 흔히 말하듯 자아의 총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거야. 자아가 위축되지 않고 그 부피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화분에 물을 주듯 추억에도 물을 주어야만 하고, 이 물 주기가 과거의 증인, 말하자면 친구들과 규칙적 접촉을 요구하는 거야. 그들은 우리의 거울, 우리의 기억인 셈이지. 우리는 친구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다만 우리가 자아를 비춰 볼 수 있도록 그들이 이따금 거울의 윤을 내주는 것을 바랄 따름이지.


 만남이라는 것은 삶에서 특별한 계기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고작 20대의 중반을 거쳤지만 지금까지 거쳐온 사람들의 수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를 위한 사고는 고작 이름을 상기하면서 기억을 헤집는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의 수를 생각해보았을 때, 새로운 타인과의 만남은 불가피하다. 또한 확연히 세워지는 것은 지속이 가능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의심이다. 모든 만남의 지속이 일치된 경험 속에서 향유된다는 사실은 유일무이한 자아의 근거들에 집중되어 있다. 타자를 마주하는 경험은 새로움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이미 형성된 준칙들-편견이나 선입견에 기초해 있을지도 모르는 것들-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인식하게 된다. 그 계기들이 어떤 새로운 생성이나 합생을 통해 범주화된 이해 속에서 일치를 만들어 낸다면 지속성에 대한 어떤 의심도 생기지 않겠지만, 이것은 개인적인 바람이 의존해 있을뿐 아마 고민에 빠지는 순간이 훨씬 많을 것이 분명하다. 타인에 대한 탁월한 이해나 존중을 행하는 윤리적 인간은 그 자체로서 이미 자아의 초월적인 측면이 부각된다는 것이 확실하다. 초월이라는 것은 생산이므로, 초월의 주체는 자신의 정신에 무한한 의지를 소여시키는 중이다. 이미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아낌없이 제공하는 어머니 상의 사랑이 초월적 관계를 충분히 설명해 준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들을 이용해 먹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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