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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Mar 19. 2019

삶의 진정성이라는 것이 있을까?

무의식적인 반항인 걱정과 고민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규정은 지구의 자전 주기에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1년이 365일이라는 시간주기는 지구의 공전주기에 맞추어져 있다. 지구의 시간은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점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실질적으로 개인이 사용하는 시간 관념은 그 사람이 속한 공간적인 위치가 기준점이다. 또한 시간에 따라 하늘의 색도 변하고 계절도 순환하고 어느 누구나 늙어 간다. 그런데 이런 기준점들을 보면 시간은 허상에 불과하다. '시간의 흐름'은 허상이다. 정량적으로 24시간을 지구의 자전 주기로 정했고 365일로 지구의 공전 주기를 정했고, 더 미세하게는 분이나 초 단위로 나누었다. 이런 확정적인 기표로 인해서 시간이라는 것이 구체적인 느낌이 들지만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을 측정하는 근거는 변화 뿐이다. 시간이 흘렀다는 것은 모든 것들이 변했다는 것을 인지했다는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도 변화 속에서 주어질 뿐이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그냥 사는 것.'이라 규정한다면 무덤덤하고 달관한 듯한 느낌이 말에 담겨있는 듯 하지만, 어떤 누군가에게 '견디는 것'이라면 약간의 격양된 감정을 담아내는 듯 하다. 그런데 가장 자명하게 주어지는 것이라면 역시 인간은 '죽어가는 존재'이다. 생명의 존엄이라는 공허한 관념을 추구하는 어떤 생물들일지라도 이 숙명적 사실은 불가피하고, 지구상의 한 종인 인간 또한 시간 속에서 무기력해지는 존재이다.


 '시간을 소중히 쓴다.'는 말에 사회적 가치가 반영되면서 시간의 쓰임은 부와 명예를 얻는다는 것이 보편적인 성공으로 맞추어져 해석되는 경향이 현대 사회에서 다분하다. 현시대에서 이런 경향성은 시간에 사회적인 의무가 부과되었을 때 나타난다. 가장 좋은 예시가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라는 계율과도 같은 신성한 문구일 것이다. 새로운 도전을 앞둔, 미래의 가능태들을 실현시키기 위해 계획에 몰두하고 있는 어느 누구나 자신의 현재 나이와 앞으로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여유 시간의 격차를 가늠해볼 것이다. 그리고 성공까지의 마감 기한을 스스로에게 부과한다. 그런데 이 '마감'이라는 경계선의 근거들에는 앞서 설명한 사회적 기준이 지배적으로 작용한다. 만약 어느 시점까지 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명령을 치켜 세우게 될 때, 이것은 자율적인 행위로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그 근거들은 자신이 지금껏 축적한 사회적 통념들 내에서 추합한다는 것을 쉽게 인지할 수 있다. 즉 스스로의 선택처럼 보여도 이미 수동적인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에 어떤 선택일지라도 무언가가 자신의 선택을 좌지우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선택들이 모여 적절한 시기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를 바란다. 누구나 찬동할만한 '기회'나 '때' 따위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적절한 시기'라는 기준과 자기 만족은 집단적 동조에 더 가깝게 보인다.


 사회적인 시선에서 제시한 정언적이어 보이는 말들의 유효성에 대해 반감을 갖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가치의 언어들의 의미도 여러 관점에서 실용적으로 받아들여질만한 근거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시 되는 건 이런 사회적인 구조 내에서 모든 개인들은 오로지 효율성을 위해서만 노력하게 되었다. 열정이나 최선과 같은 성취에 필요한 수단들은 어느 순간, 구조의 효율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것은 자본주의 내에서 이행되는 이례적인 사태가 아니다. 개인의 삶에 열과 성의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 구조주의적 찬양으로 이어지는 근거는 '나태'를 죄악으로 여기는 종교적 입장에서나 아니면 사회가 미성숙한 어린 아이나 소년, 소녀보다는 '어른'이라는 책임감 있는 인간상을 원하는 것과도 일맥한다. 즉 개인의 노력은 사회의 제반 조건이다.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사회를 지탱하기 위한 하나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의 반목은 시간의 기준이 집단의 효율성에 맹목적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경제 원리 내로 편입하지 않는 무언가는(그것이 인간이든 사물이든) 무가치하게 규정된다는 것이다. 분명 개인의 삶은 중요하다. 반대로 사회의 지속성도 중요하다. 이 둘은 끊임없이 상충하는 대치 관계로 균형을 이루어야 함이 마땅하다. 사회적 기준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개인의 가치를 할당한다. 어쩌면 이것은 굉장히 편리하다. 가치를 화폐라는 수단을 통해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것이 비윤리적이라는 명분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것들이 그런 식으로 평가되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가 없다.


 집단적 의식 속에서 규정된 개인의 가치를 진정 자신이 누리고 싶은 것들이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이 숙명을 억지로 상기하지 않아도 죽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에 물음을 던졌을 때 모든 것들이 '무'가 되어버리는 순간은 끔찍하게 받아들여 진다. 그것이 당장 내일이라면 더욱이 그렇다. 우연적인 속성을 갖는 죽음은 미지의 상태로서 인간에게 주어진다. 그래서 삶이 가치 있다는 것은 죽음 앞에서의 무의식적인 복종이고 의식적으로는 반항적인 사고이다. 실질적인 삶의 가치 평가는 생애의 한정성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기에 이런 사실이 모호하게나마 무의식적으로 인지되어서 삶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죽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죽지 않는다면 이러나 저러나 시간은 어딘가에 쓰이고 있다. 그것이 악행이 될 가능성이 있을 수 있고 나태가 될 수 있고 또는 막대한 부를 생산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아니면 호기심을 충족하면서 지식을 생산하거나 소중한 사람들과 행복한 추억을 남기는 일일 수도 있다. 여러 존재양식들로 삶이 구축되지만, 삶을 소비하는 것이 인간이다. 어쩌면 자신이 시간을 투자하고 몰두하는 어떤 대상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고, 자신의 것들에 애착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말에 동의를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모든 것들이 효율성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어떤 불만이나 슬픔과 같은 부정적인 시각을 갖더라도 이것도 살아있을 때만 유효하다. 한정되어 있다는 삶 앞에서 양심에 호소한다면 진정 내가 이 삶에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인생이 두바퀴 더 돌면 끝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아쉬우면서 그렇다고 영원히 살기는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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