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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Feb 17. 2019

예언가들을 지옥으로 보낸 단테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이유

 이탈리아 시인 단테를 천재라고 한다. 대략 700년 전의 사람으로, 지옥에 대한 묘사를 해야할 때 아직까지도 단테의 글에서 소재를 가져온다고 한다. 지옥을 절절하게 묘사한 그의 시편에 등장하는 관념들은 공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죽음 이후의 사후 세계나 신의 실재성 같은 난해한 변론들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다. 단테의 생각이 어떻게 삶의 구석에 파고들어 있는지가 중요하다.


 선악에 대한 담론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논의이다. 명확한 답이 정해져 있지 않고 또한 선과 악은 현상에 대한 비유에 불과하다. 비트겐슈타인의 주장대로라면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언어적으로 무의미한 담론이 된다. 인간이 신의 이름을 빌려와 선과 악을 구분했던 유럽 중세시대에도 선악에 대한 판단은 인간의 기준일 뿐이었으니, 이에 관련된 모든 논쟁들은 인간의 오만한 시선이라 할 수 있다. 단테는 분명 뛰어난 필력과 비견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인간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단테의 서사시에서 그가 지옥으로 보내버린 역사 속의 수많은 인물들은-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자유를 침해하는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윤리에 어긋난 사람들도 있지만-단테의 정의관이나 가치관에 들어맞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특히, <단테의 신곡>의 제 8옥의 넷째 구렁이는 생전에 미래를 점친 불손한 자들이 몸통 위에 머리가 꺽인 상태로 뒤를 보면서 뒷걸음질 치는 벌을 받고 있다. 그들의 눈물은 엉덩이를 타고 흘러 내린다. 단테는 미래를 예언한 오만한 사람들을 허구이지만 지옥으로 보내버렸다. 왜 그들을 지옥으로 보냈을까?


 인간은 분명 현재를 살아가지만 이 현재보다 과거나 미래에 더욱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듯하다. 상상의 질서는 삶에서 본질적인 질서로서, 추억을 회상하거나 미래를 계획하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또한 인간관계나 사물에 투영시키는 관념들 등도 모두 여기에 속한다. 또한 한 개인의 상상들인 미래에 대한 기대나 욕망들을 품고 사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미래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고 욕망하지 않는 것은 동물과 다를 바 없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일을 계획하고 수행하기에 앞서 그것을 통해 얻게 될 성취물들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잘못될 가능성을 염두하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다. 긍정과 부정을 교차시키는 이런 생각들이 가능한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미래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를 생각한다는 건 마치 주변이 어두컴컴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길을 걷는 것과 같다. 간혹 군대에서 아무것도 없는 먼 곳을 가리키면서 응시하는 곳을 '군생활'이라고 비유하면서 후임에게 장난을 치는데, 원래 미래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상황에서 인간은 두려움을 느낀다.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알려고 한다. 그 어둠 속에 감춰진 것을 좋게 생각해도 되는데 그렇기란 정말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본성이다. 미래는 그 자체로도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으면서 상상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시간대이다. 단테가 지옥으로 보내버린 예언가들은 이런 인간의 본성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였을 수 있다. 단테의 생각처럼 그들은 알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상기하면서 어둠 속을 너무 깊게 들여다보려 했고 그럴수록 의식은 무수한 착각들과 망상으로 채워지게 된다.그럴수록 그들의 삶은 허상에 집어삼켜진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세상 모든 일들이 뜻대로 이루어지지만은 않는다. 아무래도 운이 조금 나빴던 사람들이 이 세상엔 더 많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럴수록 지금 발을 붙인 현재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단테가 상상한 지옥으로 가지 않는 방법이다.


 이런 생각들은 철학에서 실존주의적인 고찰에 전제되어 있는, 모든 존재자 보다 우위에 있는 '현존재'개념과도 유사하다. 인간은 미래나 과거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오로지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현재를 기점으로 미래나 과거를 생각해보면 과거나 미래와 같은 시간대들은 의식적으로만 존재한다. 과거는 내가 살아온 수많은 현재들의 기억을 매개로 이해될 뿐이고, 미래는 내가 지금껏 살아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막연한 가정으로 기약될 뿐이다. 또한 미래의 일은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사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고 사변적인 통찰로는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이 단테가 그들을 지옥으로 보내면서 전하고 싶었던 말이라 생각한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미래는 오늘 하루하루가 모여서 만들어진다. 그러니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사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고 기대와 내면의 근거들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너무 당연한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 걱정이 따라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비이성적인 사고들은 실존주의 철학자인 하이데거가 현존재의 본질을 '염려'라고 규정한 것과도 접점을 이룬다. 걱정과 고민을 하는 건 어찌 보면 고등한 사고를 한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유일하게 가장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생각해 온 것들을 믿고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한다. 오늘 하루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항상 의식적으로 반복하지만, 지금을 쓸 데 없는 걱정과 고민들로 채워 넣으면서 단테의 지옥 속에 살고 있진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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