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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Feb 10. 2019

필연적으로 등장할 광인

사랑받지 못하는 자아의 광기화

 근래뿐만 아니라 최근까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소식들이 간간이 들려 온다.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미 알고 있다.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해야만이 관계가 유지되고 서로의 자유를 더 늘릴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미 예수는 2,000년 전에 '네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실현 불가능한 답변을 풀어 놓았다. 아마 예수의 말대로만 지켜진다면 이 세상에 고통받는 사람들이나 불미스러운 사건들은 일어나지 않을텐데, 지켜지지 못하는 계율이기 때문에 공허한 이유이기도 하다.


 작년에 가장 큰 이슈가 되었던 일로 시간이 좀 흘렀지만 'pc방 살인사건'에 대한 사견을 풀어보고자 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한 명의 미치광이가 인간이 한 짓이라고 여길 수 없을 정도로, 젊은 청년의 삶을 무참히 끝내버렸던 사긴이다. 그리고 대중들의 모든 비난의 화살은 살인자에게 향했다. 굉장히 옳은 일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든 폭력이나 살인 같은 것들이 정당화되기는 힘들기 때문에 또한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 분노할 수 있다는 건 마음속에 정의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건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광인은 자신이 한 짓 때문에 한 생명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신의 인생이 파탄나버렸다. 그 사람이 수감시설에서 아무리 교화되고 교육을 받는다고 한들 평생 따라다닐 낙인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반문이 생긴다. 도대체 무엇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고 싶다. 유아기적을 생각했을 때, 그 사람에게 태어났을 때부터 잠재적으로 범죄를 저지를 성향이 내포되어 있어 그런 만행을 저질렀을까? 나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하고 맞다고 한들 그걸 알아낼만한 기술은 아직 없다. 한나 아렌트는 히틀러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에 참여하면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주장한다. 우리가 사회적 악이라 치부하는 한 개인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아버지이거나 어머니, 좋은 아들이자 딸, 좋은 자식, 좋은 친구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여건에 의해서 충분히 악행을 저지를 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 사회적 화두가 되었던 이 살인자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형이자 좋은 아들, 그리고 친구로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주 사소한 마찰이 있었고 그걸 참지 못해 모든 것들을 잃게 되었다.


 인간은 상실감에 굉장히 취약하다. 아예 없는 것보다는 있다가 없는 것이 더 문제가 된다. 우리가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동시에 잃을 수도 있는 가능적 상황도 품고 있기 때문에 가진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아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인간의 성향이 있기 때문에, 법을 준수하는 이유는 자율적으로 윤리의식을 갖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법을 어길 시 책임을 묻기 때문이기도 한다. 간단한 예로, 화가 나서 누군가를 때리고 싶다가도 깽값을 물 생각을 한다면 주먹이 먼저 나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소유한 것을 잃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화를 돋운 사람에게 이익을 주고, 그런 결과를 감당하는 건 자신이고 누군가를 원망할 수도 없다. 그런데 가장 무서운 사람이 있다면 잃을 게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 사람은 잃을 게 없는 사람이었다. 아마 자신이 생각한 대로 삶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일이 있고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있다. 그런데 자신이 생각하는 일이 자신의 뜻대로 풀리지 않게 되면 인간은 심리적 압박감을 받게 되고 그런 것들이 계속 쌓이면서 어느 순간 무기력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것이 있다면 잃을 게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인간의 간사함이란 원래 누리고 있던 것들을 더 이상 만끽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PC방에 가서 게임을 하는 것도 무가치해 보일지언정 자유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 사소한 것조차 잃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감사하거나 인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자존감은 바닥을 기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물음조차 던질 수가 없었고 그걸 회생시킬만한 계기를 얻을 수도 없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한 개인은 자신을 파괴시키거나 타인을 파멸로 이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었는데 피학적인 성향과 가학적인 성향의 개인이다. 이 경향의 근본 원인은 인간이 고독하기 때문인데, 전자는 누군가에게 복종하면서 타자와 자신을 결합시키고 후자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강요하면서 타자와 자신을 결합시키는 것이 인간이 고독을 벗어나는 방법들이다. 그런데 자신을 어느 누구와도 결합시킬 수 없는 자아는 삶에 대해 아무런 의미도 규정하지 못한다. 이 살인자처럼 존중받지 못하는 한 사람의 말로는 광인이 되어 스스로 삶을 끝내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억눌린 광기를 풀어헤치는 것, 둘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그 사람은 태어났을 때부터 광인이었던 것이 아니다. 그의 광기는 만들어졌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의 노력이 부족해서 원하는 걸 성취할만한 근력이 없었고, 인간성이 더러워 아무런 관계도 지향하지 못해 존재감 없이 존재했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삶에 대해 감사할 줄을 몰랐다. 앞으로 이런 광인들이 등장하는 사건들은 팽배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이 세상의 많은 욕망들이 저지되고 있으며, 그 결핍은 이루지 못한 후회와 불만의 소산이 되어 꾸준히 개인들의 정신을 억압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안위를 챙기기도 바쁜 시대가 될수록 자기 보존적 성향이 강해지면서 오직 개인들의 이기심에만 초점이 맞춰진 사회는 병리적인 현상으로 돌입하게 된다.


 선악은 비유에 불과하고 사회가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가치영역이다. 그래서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모호하고 마땅한 답을 내어 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인간으 본성은 악하다는 쪽에 많은 사람들이 표를 던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 사회에서 계속 등장하는 광인들을 보면 인간이 선하다는 주장에 대한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악'이라 치부되는 것들은 사회적 문제를 동반하기 때문에 낙인을 찍고 문제 삼는 것은 합당하다. 그런데 악인은 처음부터 악인이 아니었다. 악으로 치부되는 인간은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만들어진다. 그런 사람들에게 선처를 기대할 수는 없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 말인지, 어느 누구도 여기에 쉽게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수가 인류 역사상 지금까지도 독보적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수많은 사도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그를 말미암는다고 해도 현실적인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을 향해 있어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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