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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Feb 08. 2019

'파리스의 사과'로 바라본 남녀관계

사랑에 대한 남녀 간의 입장 차이

 사과는 상징적인 과일이다. 사과라는 과일이 역사적이거나 신화적인 이야기에 종종 등장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목도할 수 있다. 예컨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관찰하나 후 만유인력을 통찰한 뉴턴이나 사과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주야장천 사과를 습작한 세잔, 아니면 성경에서 말하는 선악과도 사과이다. 빌 헬름 텔의 아들 머리 위에 올려놓은 과일도 사과이고 영화를 보다가도 종종 사과를 꺼내 드는 주인공들 까지. 사과는 칼 융의 용어로 '원상', 어떤 최초의 이미지이다. 그래서 어떤 과일이 이야기의 소재로 필요로 할 때라면 가장 처음으로 연상되는 이미지는 사과일 수도 있다. 가령, 성경에 선악과가 사과가 아니라 배나 감이었다면 수많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과일이 사과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하필 뉴턴이 사과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했고 세잔의 취향이었고 뱀이 이브에게 사과를 먹으라 유혹했다. 엘런 튜닝은 백설공주처럼 하필 사과에 청산가리를 묻혀 자살을 했다. 사과는 역사적으로나 허구적인 서사에서 다양한 상징적 관념들을 이해하는 소재로 사용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파리스의 사과'가 상징하는 것은 '사랑'이며 남녀의 관점을 잘 보여준다. 이것이 신화이자 허구이지만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의 행동방식과 삶의 태도에 빗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이 사건의 발단은 세 여신 중 누가 더 아름다운 지에 대한 언쟁이 시발점이었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미학적 고찰이 아니다. 그저, 상대적인 관점에서 누가 더 예쁜지에 대한 단순하고 일상적인 경쟁이다. 세 여신은 언쟁 끝에 파리스라는 곱상하게 생긴 양치기 사내에게 판단을 내리게 했다. 그 청년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여신에게 사과를 바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세 여신의 판단의 근거로 제시한 건 그들의 외관이 아니었다. 혜라는 막대한 부를, 아테네는 명성을, 그리고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의 결혼을 선택의 대가로 약속했다. 이 약속으로 인해 누가 더 아름다운 지는 그리 중요한 논점이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판단에 따른 보상이 파리스의 선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더 엄밀히 이야기하면 파리스의 욕망의 중추를 대변하기에 이르면서 세 여신의 외모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고 모두 알다시피 파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약속한 미의 여신에게 사과를 바쳤다.


 파리스의 사과는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에게 향해 있지만, 이는 자신의 욕망을 적나라케 현전한다. 즉 자신이 얻게 될 여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단순한 사실은 숱 많은 여성들의 귀를 거슬리게 할 수 있지만,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오랜 시간을 거쳐오면서도 변하지 않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많은 여성들이 인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름다움을 가꾸는데 시간을 들이고 또한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화장술이나 치장술도 덩달아서 끊임없이 진보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을 제쳐두고 파리스의 선택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헤라나 아테네가 제시한 부와 명예 또한 그에게 꽤나 매력적인 조건이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택했다. 파리스의 심리에서 찾을 수 있는 건 판단의 조건들에 대한 위계적 배열이다. 이 배열은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이룰 수 있다. 파리스에게 두 여신 헤라와 아테나가 제시한 조건인 부와 명예는 아름다운 여인을 얻는 수단이 될 순 있어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을 얻는 조건으로 부와 명예가 될 수 있지만, 부와 명예의 조건으로서의 아름다운 여인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다. 만약 파리스가 헤라나 아테네에게 사과를 바쳤다면 파리스는 부와 명예를 사랑하는 꼴이다. 그리고 이 일화에서 보여주듯이 파리스의 선택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 수단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그 배후에 놓여 있는 본연적 목적에 욕망이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프로이트의 관점대로 인간의 성적 충동인 리비도가 인간의 실천적 영역에 있어 가장 지배적인 원동력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성에게 매력적인 이성으로 보이기 위한 노력이 된다. 실제로 진화론자들의 연구에서 모든 행위는 '번식!'을 위한 일이라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한다. 특히, 야생에서 강한 수컷이 많은 암컷들을 거느리고 있는 사자의 무리처럼, 남자로 태어나 부나 명예를 얻는 건 매력적인 수컷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현실적으로도 사랑을 위한 조건들을 충당한다고 할 수 있다.(뭐, 그렇다고 한다) 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런 비약으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데, 고개를 들어 잠시나마 주변을 살펴보아도, 오직 번식이라는 하나의 목적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현실 논리의 일부만 충족하고 있다.


 일화의 구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은 파리스가 사과를 여신들에게 건넸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남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상에게만 사과를 건넨다. 파리스처럼 대다수의 남자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게만 관심을 갖는다. 다시 말해, 어떤 이성이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는 내가 어떤 이성을 좋아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즉 어떤 이성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솟구치는 동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야기 속의 '사과'를 사랑이라는 상징적 관념으로 대체하면 남자는 사랑을 주는 존재이고 여자는 사랑을 받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관계가 역전되어 있는 듯하다. 대다수의 여성들은 남성에게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열렬히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여성들이었고, 남성들은 사랑을 받고만 있었다. 연애를 하고 있는 남성들의 푸념은 대체로 여성들의 통제와 집착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여성들의 통제는 남성에 대한 불신이고 집착은 남성에 대한 보상심리에 기인한다. 쉽게 말해, 남성은 여성에게 자신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의 사랑을 계속 갈구한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되는 사랑은 황금률에 기초해 있는 듯하다. 자신의 계속 노력하면 언젠간 그 사람이 자신을 바라봐 줄 것이다? 정도로 설명하면 괜찮을까. 그리고 그런 윤리적인 시도를 실패하고 나면 그 말을 꼭 하더라.

'오빠는 도대체 왜 그래?'


 사랑이라는 건 맹목적인 감정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면, 그 대상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의심이 되는데도 믿으려고 노력하고, 배려하고 싶지 않아도 배려하게 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그 자체가 문제적이다. 실재와 상상의 괴리, 내가 생각하는 것과 대상이 일치하지 않는 정신적 긴장 상태, 즉 이 자체로 모순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대상에 대한 기대는 변화를 요청하지만 타자는 완벽하게 타자이다. 완전히 독립적인 하나의 주체이다. 그래서 서로 오고 가지 않는 사랑은, 비단 사랑뿐만이 아니라 관계의 본질로서, 일방향적인 관계의 지속은 정신적 불일치를 경험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노력에 비해 보상은 너무나도 적은 것이다. 그래서 더 사랑하는 쪽이 항상 손해이다. 여하튼, 확실한 건 소설에서 묘사되고 영화에서 연출할 법한 사랑의 절절함을 현실에서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어렵다고 말한 이유는 가끔 부러움을 유발하는 연인들이 눈에 보이는데, 그 사람들은 꽤 이상적이고 이성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남자는 사랑해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화적 사고에 대해 나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나의 욕망이 반영된 것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러니까, 어머니께서 누누이 해주신 말씀으로, 여자는 사랑받아야 하고 남자는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떠올라 이것을 기반으로 적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 경험에서 나온 말이지 않을까... 딱히 당위적인 말이라고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단순히 이런 관점으로 인간과 인간의 사랑을 이해한다는 건 오만에 불과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하나의 참조점 정도로 이해한다면 나쁘진 않을 것이다. 철학 공부를 하면서 외로워서 누군가-남자든 여자든-를 만나지는 말자!라고 다짐했었는데, 그러다 보니 두 가지에 대해서 놀라웠다. 하나는 생각보다 만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정말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이었다. 다른 하나는 생각보다도 외로움의 중압감이 너무 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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