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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Feb 08. 2019

언어의 사용 사태들이 의미하는 진정한 앎의 영역

'말하기'와' 글쓰기'의 주체성

 이 세상은 인간의 욕망들이 파생시킨 무수한 사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지구라는 광활한 대지와 바다 그리고 광막한 우주와 같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것들과 함께 인간이 세운 문명으로 겉면이 도배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 낸 수많은 이름들로 칭해지는 사물들의 환영을 누리는 존재가 되어 있다. 일정 공간을 자신의 부피로 채우고 있는 사물들은 인간과 함께 공명하면서 어느새 우리는 편리하고 익숙해진 사물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의식은 지각되는 대상을 엄밀히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감각 능력이 결여된 사람이 아닌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적인 영역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직면하고 잇는 세계에 대해서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두 다리를 지탱하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서 확실히 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은 얼마나 될까?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한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언어로 이 세계를 표현한다. 한 평생 동안 엄청난 정보들을 받아들이면서 신체의 신경 정보망은 어느 정도의 경험치를 얻게 되면서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지만, 완벽이라는 허상에 수렴하지는 않는다. 살아오면서 얻은 경험들은 일정한 범주 체계를 형성하고 있지만 난잡하게 섞여 있어 정리하지 않는다면 어질러진 방과 같이 필요한 것들을 쉽게 찾아낼 수가 없다. 그렇다 보니 내가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것들을 쉽게 뱉어낼 수도, 쉽게 쓰여질 수도 없다. 글을 쓰거나 말을 한다는 건 내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언어는 지구 상의 어떤 종들이 사용하는 소통의 체계보다 우수하다. 어느 누가 이 말에 대해서 감히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인간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딱히 비교 대상이 동물들의 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울음소리와 비교하자니, 지구라는 한정적 공간에 국한시키는 것도 편협한 근거일 수밖에 없지만, 그래서 그 우수성은 더욱 명료해진다. 언어의 체계는 미래를 향해 지식을 남긴다. 이 덕분에 기록을 통한 지식의 축적이 먹이사슬의 가장 윗부분에 위치할 수 있는 영광 아닌 영광을 부여했다. 또한 언어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체계성을 띠면서 과거보다 더 많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 더 많은 것들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과거에 몰랐거나 없었던 것들이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이 되어버리는 것은 일상에서 부지기수이지 않는가? 언어를 통해 객관적인 세계의 이러저러한 것들에 이름을 붙이면서 세상을 담아 왔고 그 원동력이 되는 호기심이 멈추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무언가를 계속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도 익숙한 언어들을 쉽게 뱉으면서도 과연 사용하는 언어가 정당하다는 것을 합당한 의심 내에서 밝혀낼 수 있는가? 우리가 진정 안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얼마나 될까? 뇌는 하루 동안에도 엄청난 양의 텍스트들을 처리하고, 시각적 기호들과 음성적 질료들을 해석하는데 에너지를 사용한다. 경제적 주체로서는 이런 것들을 소비하고 사회적 존재를 가능케 하는 것이 언어의 기능이지만, 모든 정보들에 대해 확실히 기술하거나 아니면 자의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은 편협하게 짝이 없다. 여전히 인간 인식의 틀은 세계의 밝혀지지 않은 무한한 비밀에 비하면 편협하게 짝이 없다.

 

 사물의 영역들과 말해질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인간의 고유한 소통 체계인 언어로 대변된다. 현상의 배후에 놓여진 객체적 존재와 주체의 결합을 통해 인식은 계속해서 개선된다. 우리는 어떤 것의 양태를 지칭할 때 그 대상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개별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지식들이 곧 자신의 영역이 된다. 그런데 그래서 인식은 빈약하다. 예를 들어, 막상 우리는 눈 앞에 인간이 만들어 낸 어떤 사물들의 명칭을 자연스럽게 사용하지만 실재적인 기술이나 사용된 소재들은 흔히 사용되는 기표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덮여 있다. 의자를 보고 있으면서 그것을 의자라 말하지만 그것은 의자가 아닐뿐더러 의자라고 말할 수도 있을까? 의자라는 이름으로 의자를 지칭하지만 나는 의자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의자는 의자가 아니게 된다. 의자를 모르듯 인식 능력과 가능한 감각의 영역은 확실한 괴리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앎의 결여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말하고 쓰기도 하지만 듣고 읽기 때문에 확연히 인지되는 것이다.


 독서를 하거나 타인과 대화를 할 때 일방적이든 쌍방적이든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개념이 필요하다. 만약 의자에 대해서 말하려면 상대방도 의자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담화 행위 내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가 있더라도 맥락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어려움은 덜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타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머릿속에 그것에 관련된 개념이나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지할 수 있는 것이 앎의 결여태이다. 개인적으로도 독서를 하면서 일일이 모르는 단어를 찾아가면서 보고 있으니, 한글을 20년 넘게 사용했으면서도 1개 국어도 제대로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타인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이 '앎'이라는 것의 제한적인 영역을 확실히 확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시각과 청각은 정보들이 이미 한 번쯤 얻은 것이었다면 정보를 수용하는데 어려움이 덜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의자'에 대해서 주절주절 이야기를 한다면 그 말을 알아듣는데 딱히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의자'에 대해서 말해야 할 상황이거나 글로 적어야 한다면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여기서 드러나는 진정한 앎의 영역은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과 연관이 되고, 이것은 곧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발화 행위나 작문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의자'라는 사물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요구한다면, '의자'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의자가 만들어진 이유나 시기와 같은 역사적 배경, 기술적인 영역, 공정 절차나 유통 과정 등등 많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을 대중들은 '전문가'라고 부른다. 그냥 눈 앞에 의자가 보여 예시로 들었지만, 지금껏 쌓여 있는 사상들이나 학문적 개념들이나 또는 글감이나 흥미로운 대상들을 이 글에 적힌 모든 '의자'의 자리에 환치시킨다면 과연 몇 자나 적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무언가에 대해서 말하거나 글을 쓰는 도중, 그 개념들이나 논리들이 긴가민가 하다면 그건 제대로 알지 못하다는 뜻이다. 글을 쓰고 싶어도 더 이상 무언가 적히지 않고 손이 정체되어 있다는 것도, 뇌가 휴식을 원하는 것일 수 있지만, 무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면 '글쓰기는 앎과 무지를 가르고 또한 앎과 무지가 서로 꼬리를 물면서 이어지는 그 극단의 지점에서만 시작된다.'라는 간결한 한 문장으로 축약될 수 있다. 이 경계선을 확실히 구분하고 진정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영역에 확실한 임계점을 인지하는 것 또한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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