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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an 30. 2019

펜을 보고서 든 잡생각

제일 쉬워 보였지만 막상 쓰니 어려운 쓸 데 없는 글


 펜은 글을 쓰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이다. 그리고 펜 끝이 내 생각을 끊임없이 옮기고 있으니 흰 여백에 쓰인 어떤 생각이 내 생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은 불가해하다. 내가 쓴 것들은 분명 나의 어딘가에는 존재하고 있다. 또한 언어는 끊임없이 추상적일뿐인 실체가 없는 감정이나 논리를 모사하고 실제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무언가를 기술하고 있다. 이 구조에서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사용되는 그 언어들은 어떤 대상을 지칭하고 있다. 이 글을 지금 눈 앞에 놓여 있고 손에 쥐어진 펜에 대한 잡담이다.


 이 펜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꽤 있을 것이다. 펜 사용자를 대한민국이라는 국지적인 공간으로 한정시켰을 때도 나와 같이 5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과 얇게 그어지는 선에 매료된 구매자들이 분명 많을 것이다. 이 펜을 만든 기업이 해외에 이 펜을 수출한다면 사용 사태의 규모는 더 확장될 테지만 그걸 찾는 수고는 굳이 할 필요가 없다. 만약 수출한다 해도 판매가에 운송비용을 제하면 추과 이윤은 0에 수렴할 것이기 때문에 경제적 관점에서는 수출할 이유가 없다. 이런 아주 유용한 도구를 쓰지 못했던 시대에는 종종 영화에서나 볼법한 사실적인 연출로 깃털에 잉크를 찍어 발라 글을 적었다. 깃펜을 이용해 글을 적는다는 건 지금 이 펜을 사용해 글을 적는 것보다 엄청나게 귀찮은 일이었을 것이다. 잉크가 떨어져 종이에 잉크가 번져나가는 양이 희미해질 때에 또 잉크를 찍어야 했을 것이다. 이 펜으로도 글을 적다가 검은 글씨가 점점 옅어지면 짜증이 나는데 그 시절에는 어땠을까? 물론, 그 당시에 깃펜이란 비교할 수 있었던 다른 어떤 수단들보다도 우월한 방식이었기 때문에 그 불편함을 당연하게 감내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잉크를 찍어야 하는 짧은 시간 동안의 여유에서 생각이 꽃 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정신적 유희보다 그 불편함을 감수하기 싫었던 누군가의 욕망에 의해 펜이 발명되었다. 모든 변화는 불편함에서 시작하고 불편성의 극복이 인간 문명이다. 인간은 편리함을 추구해서 그런지 많은 사물들이 과거보다 더 간편해지고 소형화되는 등 효율적으로 변모했다. 만약에 시간여행이 가능해져 이 펜을 과거로 들고 가서 자신이 보고 있는 세계를 기록하려 하는 누군가에게 아니면 붓을 쓰던 우리 선조들에게 보여준다면 엄청 좋아할 것 같다.


 펜의 외관을 살펴보면 귀여운 토끼가 그려져 있는데 굳이 이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고 투박한 색으로 겉면이 도색되어 있다면 더 끌렸을 것 같다. 토끼가 그려져 있어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 펜을 소비하고 있지만 이 그림들을 통해 다른 소비자들의 효용을 더 충족시켜주고 시장에서 다른 펜들보다 더 경쟁력이 생겼을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펜의 머리 부분에는 책이나 옷깃에 꽂을 수 있게 핀처럼 만들어져 있다. 이 부분을 '노크'라고 부른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 부분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는지 한 번 생각해 밨는데, 나는 종종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 중단할 때 일정 양의 종이를 이 부분에 밀어 넣어 활동이 정지된 곳을 표시한다. 그런데 그런 표식을 남기기 위해 굳이 이 부분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책갈피를 이용하거나 아니면 끈이 딸려 있는 책인 경우 그것을 사용하면 되고 아니면 그냥 기억을 해도 된다. 굳이 유용성을 따지자면 뭔가 표시를 해야 하긴 하는데 기억을 하면 잊기 십상이고, 다른 수단을 사용하려면 또 그것 나름대로 아주 사소한 수고로움을 필요로 하니 대용품으로는 괜찮은 듯하다(끈이 없는 책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런 유용성보다 펜의 노크는 휴대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너무 구시대적인 발상일 수도 있지만 멋을 위해서 고급 진 펜이나 만년필 등을 가슴팍의 주머니에 꽂고 다니는 사람이 더러 있지 않는가? 하지만 이런 500원짜리 펜을 필통이 아닌 옷 안에 품고 다니는 사람은 드물고 펜의 본연적 기능이라 할 수 있는 기록을 위해서만 펜을 몸 어딘가에 소지하고 다닐 것이다. 이것도 진짜 급하게 또는 일일이 기록을 요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나 적용되지, 그런 게 아니라면 아무런 간지도 찾을 수 없는 이 싸구려 펜에서 노크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펜의 머리 부분에 핀 역할은 비본질적이고 정형화된 펜의 모델이 제작 과정에 반영된 듯하다


 사물의 본질은 욕망이 점철된 외면적인 기표들이 아닌 기능에 존재한다. 내부를 살펴보면서 이것이 정녕 500원의 기술력인가 싶을 만큼 신기하다. 간편하게 '펜'이라고 명칭하고 있지만 볼펜이 아닌 다른 펜들도 포괄하는 명칭이다.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펜'은 '볼펜'인데, 자세히 보면 펜심이 그냥 날카로운 촉이 아니라 아주 작은 공이 계속 구르면서 잉크를 옮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용수철을 이용해서 펜심을 안에 넣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펜심이 어딘가에 부딪혀 구부러지는 슬픈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런 일들은 공교롭게 이루어지는 터라 우리의 짜증을 종종 유발한다. 이 기술을 통해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펜의 잉크가 말라 펜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불편한 상황도 방지한다. 펜의 몸통 부분에도 '사용 후에는 노크를 눌러 촉을 넣은 후 보관하세요.'라고 친절히 표기가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어릴 때 펜 뚜껑을 닫는 것을 종종 까먹어 펜을 못 쓰게 된 적이 있었는데, 요즘은 가끔 까먹어도 잉크가 마르는 경우는 좀 드문 것 같다. 그래서 촉이 망가지는 걸 방지하는 기능이 더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잉크를 채워 넣은 기둥을 살펴보면 가장 뒷부분에 잉크가 아닌 투명한 액체가 채워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잉크가 아닌 다른 액체가 채워져 있는 것이 좀 의아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추측해 보았다. 일단, 강철알이 잉크를 계속 옮기면서 잉크가 채워져 있던 곳은 계속 비워지게 된다. 이 부분은 진공상태가 된다. 그로 인해 발생한 외압이 잉크를 밀지 않고 유입된 공기를 그대로 통과시켜 버린다. 가끔 기둥의 군데군데 앞으로 밀리지 않은 잉크가 묻은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투명한 젤의 역할은 공기를 통과시키지 않고 외압을 균등하게 받으면서 잉크를 앞으로 밀어내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런데 막상 녹색창에 검색해보니 잉크의 역류를 방지하는 기능이라 한다. 더 소름인 건 필통 속에 다른 펜은 이런 투명한 액체가 없다. 잘 모르겠다. 그리고 펜 대에 종종 고무 패킹이 되어 있다. 미끄럼과 굳은 살을 조금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중고등학생 때 샤프에 손가락으로 잡는 부분이 젤리로 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큰 금액을 지불하고 샀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쓸 데 없는 소비였다. 손의 굳은살이 박히는 게 더 영광스러운 것이 요즘이다.


 영국의 언어철학에서 기라성 같은 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의 주장은 언어는 세계의 거울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항상 2차원적 평면 도식을 시각적으로 인지한다. 그리고 언어를 통해 감각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하고 쓰일 수 있다. 말과 글의 언어들이 하나의 그림처럼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그림 이론'으로 현상학적인 이해를 요구하는 개념이다. 최근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아예 생각이 없는 건지 몰라 답답한 마음이 생겨 뭐라도 생각해 보려고 눈 앞의 상황을 한 번 적어보고 싶었다. 그 중 항상 익숙하게 느낀 펜이 만만해 보여 적게 되었다. 처음에는 묘사문을 적으려고 했는데 막상 적으려고 하다보니 적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았다. 문호들의 지성이란. 내 손은 길쭉길쭉한게 언제나 봐도 이쁘다. 이 손을 욕망하는 일에만 몰두하게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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