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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an 25. 2019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기

불안에 대처하는 논리적 허무감

 삶에는 무조건 '희생'이라는 것이 따른다. 개인적으로 이 단어는 굉장히 고귀하다고 예전부터 생각했었다. 흔히 역사적으로도 타자를 위해 희생을 감수한 사람들의 정신을 칭송하고 그 행위에 아름다운 수식어들을 첨부한다. 하지만 희생이라는 것이 결코 거룩한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 속에서 이것은 사소하면서도 고질적인 문제를 끊임없이 양산하기 때문이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희생한다는 것은 자신의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문제가 의식의 표면 위로 드러난 때는 한 개인이 계속해서 직면해야 할 선택의 순간들이다. 선택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우리는 하루 세 끼를 어떻게 해결할지부터 어떤 사람들과 교제하고 미래에 어떤 일을 할 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걱정한다. 그리고 삶에서 꾸준히 일어났던 이런 선택들의 총체가 현재를 만들어냈지 않는가?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대로 '인생은 B와 D 사이의 C'이다(실존적 자아를 완성시키는 가장 합리적이고 모범적 답안에 가까운 말이라 생각한다.) 이 선택이라는 것은 대체로 주체의 욕망과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반드시 대가가 따르고 선택하지 않는 무언가는 시간에 집어삼켜진다. 다시 말해, 선택되지 못한 또는 않은 자기 자신과 관련된 무언가를 희생시켜야 하는 것이 삶의 불합리한 단면이다. 익숙한 경제 용어로 환원시키면 '기회비용'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가 지금 포기해야 하는 무언가는 결코 가치 없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가치 없었다면 우리는 에너지를 써가며 쓸 데 없이 고민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만약 모든 것들이 생각대로만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에 신경증적인 문제를 겪는 사람은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게 된다. 하지만 이 선택 자체가 원인의 전부가 되는 건 아니다. 더 본질적인 원인은 자원의 희소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 또한 희소하고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주어진 시간 내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선택하기 때문에 인생의 모든 선택의 문제는 시간문제라 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인간의 욕망은 정말 무한한데 반해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만약 인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삶을 지속한다면 인간이 욕망하는 일들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아마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것이다. 그게 가능하다면 어차피 200년 후에 하면 될 일을 굳이 지금 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선택한 모든 것들이 결코 원하는 뱡향대로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선택에는 자신이 원하거나 관심을 가진 것들에 대한 보상이 따르기 마련인데 그런 것들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염려와 그에 따른 불안도 삶과 함께 항시 더불어 있게 된다. 한 인간은 주변 상황을 통제할 수 없을뿐더러 나 조차도 제대로 통제하기 힘들다. 하지만 통제하지 못할수록 우리가 희생해야 할 것들은 점점 더 많이 지게 되는 것도 자명하다.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상실의 대상은 단순히 부나 명성 같은 것들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관념적인 어떤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또한 처음부터 없었던 것보다 있다 없는 게 그 빈자리를 더 강조하는 법이다. 앞서 말한 사르트르의 문구를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의 무수한 C들 이전에 B와 D라는 두 가지 엄연한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이미 태어났고 삶의 끝이 죽음이라는 허무한 사실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건 이 상실감의 가장 극적인 형상으로 이 문턱을 넘은 사람은 모든 것들을 잃게 된다. 누군가 지금껏 엄청난 부를 소지했거나 명예를 쌓더라도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뜻이다. 진시황이 그토록 영생을 누리고 싶어 했던 이유도 자신이 쌓은 것들을 상실하게 되는 인간의 숙명 앞에서 초연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수은을 마시고 자신의 명을 재촉하게 되었다. '죽음'은 탄생의 이편에서 항시 대기하면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을 빼앗아 갈 준비를 하고 있으며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한 무게를 부과한다. 삶이 무의미하고 한낮 꿈에 불과한 것도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이 배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자명하고도 그 뒤는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사실을 인지했을 때, 그리고 지금 눈 앞에 있는 세상을 언젠간 볼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상기했을 때, 이 삶 속에서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까? 우리의 선택에 앞선 수많은 걱정과 고민들로 인한 불안이나 고통으로 가득 찬 최악의 세계에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에 불만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지금은 현존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이 만든 제품을 사용하고 그의 말을 계속해서 되풀이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건 무언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죽을 몸입니다. 그러므로 가슴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물음이 망각되었으며 은연중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우연을 가장한 운명으로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치기도 한다. 극단적인 예시겠지만 오늘 밤 집에 가다가 차에라도 치여 생이 끝나면 이 글이 나의 마지막 기록이 될 수도 있다. 보통의 경우처럼 몸이 늙고 병이 들어 죽는 건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죽음은 인식 불가능한 영역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렇다고 죽음에 대한 경험담을 직접 들을 수는 없다. 그저 타자의 죽음, 특히 가까운 주변인들의 부재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건 허무함 그 자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허무한 논리 앞에서 나를 덮쳐오는 부정적인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오직 '살아 있다.'라는 것이 삶의 유일한 의미이자 행복임을 깨달았을 때 개인적으로 엄청난 황홀경을 맛 보았다. 그 순간을 다시 느끼기 위해 노력해도 그때의 감성이 되살아나진 않는 것이 아쉽다. 그럴 수 없더라도 나 자신이 내가 가진 생각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 대한 회의가 깊어지고 밤공기를 무기력으로 가득 채울 즈음에 항상 이 생각을 다시 하곤 한다. <데미안>의 문구로 글을 마치고 싶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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