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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un 04. 2019

'요몽신화'와 사회의 붕괴

뮈토스적 사고의 해석과 사회의 특이점

 '요몽'은 인간의 공포심, 두려움, 불안, 슬픔,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먹고사는 귀신이다. 이 비실체적인 존재들은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해 인간을 부정적인 감정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이것들의 힘이 세계의 질서를 관장하는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힘의 임계치를 넘어설 때, '요몽'은 세게를 초기화시킨다. 왜 초기화를 시키는지는 모른다. 이 초기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른다. 이야기 자체가 얼토당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화적인 이야기로 상기해볼 수 성서의 내용은 '노아의 방주'이다. 대홍수에 휩쓸려 나가 버린 인간의 모든 것들. 그 와중에도 선택받아 살아남게 된 노아. 종교를 믿진 않지만 꽤 흥미롭지 않은가? 신화적인 사고 속에서 발견되는 의미효과는 현재의 사태를 이해하는 도움을 준다. 그도 그럴 것이 신화적 이야기는 단순한 허구를 넘어선다. 왜냐하면 담화와 그 담화의 주체들 그리고 소재의 연원은 인간과 인간 전반의 삶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과 의식, 그리고 실천적 영역에서의 외화물들이 서사의 중축을 구성한다. 


 '요몽'과 사회가 무슨 관련이 있을까? 문화의 담지자인 인간은 역사의 사실적 기록들을 통해서 과거를 엿본다. 수많은 역사에 점철되어 있는 주된 이야기들은 분열과 통합의 과정이다. 하나의 동일자를 구성하는 것. 이는 곧 윤리적 범주이고 구조를 의미한다. 하지만 동일성을 지향하는 여러 항들은 언제나 유사성에 종속되어 있다. 결코 완벽한 동일함을 형성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징적 질서 안에서 삶을 영위한다. 그 안에서도 개체적 동일자를 구성할 수 있는 존재자의 합은 통합으로, 반대로 동일자를 구성하지 못하고 비대칭적인 구도를 유지하면 분열이 발생한다. 요컨대, 생각이 비슷하거나 또는 다를 뿐이라는 것을 조금 힘주어 표현해 보았다. 그리고 모든 불화에서의 덕목은 자신들이 더 가치 있기를 바라는 존재론적인 욕망에 깃들어 있다. 자기 자신이 옳음으로써 자신의 가치는 더욱 값지다. 그런데 무언가 '가치 있다'라고 규정하려면 그것이 꽤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의미를 추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더 합당한 정의라고 여겨지는데, 이런 측면에서 그 어느 것에 '가치'란 말을 붙일 수 있을까? 가치의 정의는 타락한 듯하다. 다수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가학적으로 억압함으로써 얻어지는 우월감을 즐기는데에 가치를 활용한다. 서로를 반목하게 만드는 이념적 가치를 숭상하고 또한 자신의 긍정성을 증명하는 우상화 전략은 자신이 누군가보다 더 나은 곳에 위치하는 것으로만 존재감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조건이 형성되어야만 한다. 첫 번째는 깎아내릴 무언가, 즉 타자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의존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자기-self'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열위에 처한 타인은 자신의 오류를 드러냄과 동시에 회의를 갖는다. 패배의식은 자신을 문제 삼게 되는 시작점이자 부정성의 요인이다.


 신화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열위에 처한 인간은 자신에게서 어떤 가치도 발생시키지 못한다. 이 문제는 경쟁의 본질이다. 야만의 질서가 구축된 장에서는 게임이나 스포츠에서 찾을 수 있는 선의의 열정이나 상호 간의 존중을 찾을 수 없다. 경쟁 구도에서 패배한 사람은 내가 아무런 쓸 모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라고 내외부적으로 낙인찍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존재의 의미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런 사람들은 존재적으로 아무런 전제를 갖지 못한다. 그 빈 공간은 온갖 부정적 사유들이 연역된다.(프로이트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공격적 성향이 무가치함의 자리에서 피어난다는 주장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현상들이 사회에 팽배하고 만연할수록 사회는 병리학의 영역으로 입점한다. 해석적 지평에서 '요몽'은 곧 인간과 다름 아니다.


 요몽신화에서 '요몽'들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세상을 초기화한다. 사회에서 인간들은 그들의 우열에 상관없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면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한다. 니체의 말대로 삶은 '힘에의 의지'니까! 그리고 기초 지어진 규범들은 아슬아슬하게 그 틀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의 인간의 결핍과 회의는 폭력성으로 대체된다. 인간관계에서 서로 간의 불화가 커질수록 그리고 자기 자신의 욕망이 저지됨에 따라 생겨나는 가학성의 양은 사회 구조를 파괴시키기에 이른다. 이는 블랙홀과 같다. 끊임없이 주변의 물질들과 비물질적 에너지를 함열하는 블랙홀은 자신이 내부에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의 한계치를 넘어서면 자신의 본래적인 형상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 시뮬라크르는 더 이상 본뜨기나 복제라는 단계를 거치지도 않고 곧장 발생학적인 극소화된 단계를 거친다.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는, 극소로 존재조차 하지 않는 어떤 기억 속으로 모든 공간이 함열한다. 돌이킬 수 없는, 내재적인, 더욱더 밀집된, 잠재적으로 포화된, 그리고 다시는 결코 해방적인 폭발을 알지 못할 어떤 질서의 시뮬라시옹. 
-Jean Baudrillard <시뮬라시옹>-

 질서를 유지하는 건 분명 중요하다.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안에서 밖으로 뛰쳐나가는 순간 마주하는 건 혼돈일 뿐이다. (대체로 천재라 불리던 사람들이 하는 짓이더라) 허나, 스스로 뛰쳐나가는 반시대적인 성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튕겨나가 버린 존재들의 성격, 그들이 가진 반사회성을 쉽게 목도하는 것이 현실의 안타까움이다. 그 외화된 힘이 추구하는 무질서는 폭력이나 비합리적인 상황을 고스란히 아무렇지 않은 일로 되돌려버린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하지만 도덕성에 대한 의심은 수 세기 동안 반복되어 온 것이 아니던가. 또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문제적이지 않은가. 현시점에서 합리적인 질서는 자아를 말살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다. 그리고 시대의 틀은 모든 개인들의 개성을 시뮬라크르로 대체한다. 시뮬라크르, 즉 아무런 차이가 없는 상태, 복제품의 복제품, 스스로 '흘러넘침'을 억제하는 존재로 정의 내린다.


 포스트-모던에서는 사회를 하나의 틀로 비유한다. 이 비유는 이 틀 자체가 비가시적이고 추상적이지만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 틀 내에서 모든 개개인들은 자신의 삶을 영위한다. 그렇기에 이 틀의 기능적 역할이라 함은, 모든 개인들을 함열하며 개개인들은 의무화된 질서에 따라 책임을 지는 것이다. 자본주의만큼 이것을 잘 수행해 낸 사례는 아직 없다. 하지만 개인들이 부정적으로 변모할수록 규범의 붕괴는 시간문제이다. 개인들이 감정을 가질수록 공동체는 비틀거린다. 자신의 저지된 무언가를 성취할 수 없을 때 합리성의 편협함이 비친다. 서로에 대한 불신은 점차 고조되는 현상은 붕괴의 조짐을 계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즉 신화적 이야기에나 나오는 멸망은 필연적이다. 또한 다른 조짐으로써, 그런 사회일수록 서로는 서로에게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오직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만 살게 된다. 


 지금까지 적은 글은 디스토피아적이지만, 그렇다고 최악이 발생하는 것을 예견하는 건 결코 아니다. 또한 확실하지 않다고 단정 짓는 것도 결코 아니다. '최악'이나 '디스토피아'라는 표현은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환원해내는 상상적 이미지에 따라 감정의 강도가 결정될 터지만 말이다. 그냥 갑자기 떠올라서 끄적인 것이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ps. 참고로, 사실 일본 애니메이션 '경계의 저편' 보고서 든 생각이다. 애니에 열성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냥 가끔 불현듯 꽂혀버려서 하루 종일 봐버린다. 그리고 '요몽'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봐도 관련 내용을 찾을 수 없었다. 굉장히 오컬트적인, 즉 신비스럽고 괴기한 것이긴 한데 그렇다고 영성스러운(?) 것은 아니라, '신화적'이라는 표현을 붙이기가 사실 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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