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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Aug 18. 2019

우월성에 대한 반사회적 고찰

자신의 자리에서 출발해야 하는 내재성의 심급에 대하여

 우리는 a보다 b가 더 낫다는 식으로 모든 것들을 규정지을 수 있다. 여기서는 확실한 기준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기준은 a와 b라는 두 대상을 양분한다. 분할된 대상들을 규정짓는 것에서는 상대적인 관점이 배제될 수 없다. 또한 이는 꽤 간편한 방식이다. 가령 지금도 점수를 통해서 사람들의 등급을 매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방식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둘 이상의 대상이 존재해야만 한다. 우열을 가리는 방식에서 b가 a보다 낫다면 a가 있어야만 b가 더 낫다는 규정이 내려진다. a가 없다면 b는 그냥 b일 뿐이다. 그런데 원래는 b는 그냥 b이다. 인식적 기준을 들이 밀어 비교를 하기 이전에는 a도 그냥 a일 뿐이다. 그러나 엄밀히는 비교를 한 후에도 a는 a일 뿐이고 b는 b일 뿐이다.


 우리는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라는 원칙을 종종 듣는다. 그런데 우리는 남과 항상 비교를 한다. 이것이 너무나도 익숙한 방식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인 건지 또한 레비 스트로스가 주장한 데로 '야만의 질서'가 사회의 기층에서 자리 잡고 있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상학적으로 굳이 나의 세계에 타인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하나의 원칙이 존립한다면 굳이 나와 타인을 비교하면서 나의 가치를 높이거나 또는 낮출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적으로는 이를 통해 존재는 본래적 자유로 돌아간다. 나는 절대다수가 이를 추종한다면 사소하게 일어나는 불운한 일들이나 외적 갈등들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이것의 실현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서 보상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충돌들에 대해서는 결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만약 '본래성'이라고 할만한 항이 집단과 집단 사이의 분쟁을 발생시키는 힘의 중추라면 이 개념은 허황될 뿐이다. (이 생각을 니체에게서 발견한다는 것은 그가 본질적 차원까지 파고 들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서로 간의 분쟁은 대개 인식적 우위를 판가름하기 위한 일들이다. 여기서는 단순히 '나도 그리고 너도 같은 인간이니까'라는 말은 틀림없으면서 양자 간의 동일한 범주를 구성하는 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효력을 가지지 못한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그 허구를 만드는 소재의 연원은 인간의 삶이다. 블랑쇼의 소설 <지극히 높은 자>의 주인공은 도입부부터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그런데 자신의 아픔을 보살피거나 폭력을 가한 사람에게 내려질 응당한 처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대사를 뱉는다.

“당신과 다를 바 없는, 그래요, 엄밀히 말하자면, 당신은 나를 때릴 수는 있죠. 하지만 나를 죽이는 것, 혹은 나를 박살 내는 건, 어때요,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요?” 나는 그의 코밑으로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내가 만약 당신과 같지 않는다면, 어째서 당신 발꿈치로 나를 짓밟지 않는 거요?”
- Maurice Blanchot <지극히 높은 자> -

 자신을 두들겨 팬 사람에게 던진 말이라니. 그가 미쳤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가해자는 이 말을 듣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경찰들은 온전한 정신이 아닌 사람이라고 취급한다. 하지만 정말 신기한(?) 일은 주인공이 뱉은 대사처럼 가해자는 그를 죽이진 않았다. 이를 보면 현실은 허구보다도 더 잔혹한 것인가? 폭력과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상황과 마주할 일이 얼마나 될까? 살면서 어떤 사람이 나를 죽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는 적은 아직 없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또 그런 일들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주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뉴스에서 종종 보이는 극단적인 상황에 노출된 불행한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충분히 발생할 수도 있는 일, 즉 자신에게 내사함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불편한 감정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궁금한 점은 주인공의 대사가 아니다. 나의 호기심은 어떤 윤리의 기초적 토대가 아니다. 나의 호기심은 주인공을 두드려 팬 가해자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인가? 이다. 소설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나오지 않는다.


 이런 폭력적 사태는 역사 전반에서 우월성을 가장한 채 점입한다.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그 시대의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함에 따라 '홀로코스트'라는 처참한 결과를 목도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특유의 웅변술과 거창한 선전문구는 나치들의 마음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말들 속에는 뒤틀린 욕망만 있었고 윤리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우기 위해서 유태인들을 반목하고 부정했다. 하지만 이 행위는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열등감을 숨기기 위한 보상적 행위에 불과했다. 타자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폭력을 일삼는 사람들의 욕망에는 열등감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앞서서 언급한 '본래적 자유'가 없다는 것은 완벽하게 독립된 주체를 상정하고 있지만 아무런 정체성 없이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연역된다. 인간은 고독에 취약하다. 어느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혼자 동떨어진 채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무의식의 자리에 '타자'를 놓은 것은 결국 고독함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선언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취약성은 그 심연을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인류 역사에서 오점으로 1.2차 세계대전을 쉽게 상기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처참하다고 지목된 사태보다도 더 과거로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역사책에는 피로 점철된 페이지들이 수두룩하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보이는 공격적 성향이란 오래전부터 거슬러 올라온 영원한 것이었고 이에 대해 반목할 순 있겠지만, 완전히 제거하는 일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시 말해, 언제 어디에서나 있어 왔던 것이고 작금의 사태도 과거의 어떤 때에 항상 있었던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다윈 이후 인간도 동물이라는 수식은-종교인이 아니라면-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인간도 자연의 사물로 자연 안에서 존재한다는 생각은 전혀 낯설지가 않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심하게 사용하는 육두문자에 동물이 많이 들어가고 또한 우리는 동물과 비교를 당하면 기분 나빠하는 동물이다. 그런데 진화론은 꽤 편리해 보인다. 이에 따라 개체의 공격적인 성향에 대해 정신 분석적 관점에 의한 설명들보다는 인간이 원래 그런 생물이라는 설명은 참으로 간편하다. 실제로도 인간의 DNA에 파충류의 유전자가 있다고 하니, 이 사실에 입각해서 공격성을 설명하는 것보다 어떻게 더 자명하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진화론적 인식을 기반한다면 인간이 구축해 놓은 사회에서 야만의 질서를 목도할 수 있는 것 또한 꽤 자연스러운 이해 방식이 되고 굳이 복잡한 해석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인간은 우월하고 싶어 한다. 즉 남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며, 어느 정도 사회적 인정을 받고 꽤 괜찮은 소유물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이런 행위들을 볼 때 시원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단순히 나의 질투 때문일까? 내가 부러워서 그런 것일까? 만약 누군가가 단순히 내가 이런 상태에 빠져 있다고 주장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하이데거적인 의미로서의, '본래성'은 나에게 더 큰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배제하기란 어렵다.


 만약에 비교를 통해 아무것도 얻어 낼 수 없다면 우리는 비교를 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리고 우월성은 비교를 통해서 얻게 된 효과이다. 하지만 이 '효과'라는 것을 무의미의 자리에 위치시키고 나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왜 우리는 남과 자신을 비교해야만 하는 그런 존재인가?' 남과 비교를 한다는 것은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본능에 깃들은 불가피한 특질이다. 이는 중심이 없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대상 a는 그냥 a이지만 비교를 하는 이유는 a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견지해주는 하나의 지표로 자리매김한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시작하며 던진 거대한 화두로, '오늘날 존재에 대한 물음은 망각되었다'라는 말과 같은 맥락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존재를 겨냥하고 있는 개념들은 무엇일까?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것은 경험일 것이다. 경험은 대체할 수 없는 항이다. 하지만 아무리 경험이 중요하다 한들, 경험해 보고 아는 것은 하책이고 경험하지 않고 아는 것이 상책이라는 공자의 말이 더 귀감이 된다. 하이데거가 죽음까지 생각해 봄으로써 우리의 삶을 진척시키라는 데에는 이미 선험성의 차원이 깃들어 있다. 실제로도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죽은 사람의 경험담을 들을 수도 없다. '죽음'이라는 것을 개념적으로 환원시킨 선험성은 허무주의적 용기로 이해될 것이다. 하지만 이 '본래적'이라는 수식은 결국 우리는 많은 것들을 경험해 보아야 한다는 말로 이해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천재가 아니므로, 선험적일 수 없다면 경험을 통해 우리 자신의 운명을 만날 수밖에 없다.


 글을 다 적고 나니 2가지 질문이 도출된다.

1. 하이데거적 '본래성'을 보편성의 자리에 놓는 것이 합당한가?

2. 왜 본래성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함으로 이해되는가? 


지금 나는 내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ps. 니체가 그의 저서에서 탁월함을 순수함의 표본으로 삼은 것은 우월성을 배반할 수 없다는 주장과 다름 아니다.(우월함을 독창성이라는 개념과 연동시킨다면 꽤 괜찮은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정신에 존속하긴 하되, 타자의 자리에서 주체가 어떻게 출현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방식을 거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방금 쓴 글들은 역설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라캉은 끊임없이 타자성을 부추기는 이유는 결국 이를 따르지 않고는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또한 여기서 선험성의 빈 틈을 발견한다. 즉 내재성의 차원은 경험을 따르지 않고는 결코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가령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종종 말하길, '명예'라는 것이 타인이 나를 불러주는 이름이기 때문에 허상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나는 그들의 말을 수긍하면서도 한 편으로 전전긍긍하는 이유는 명예라고 할만한 것을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무얼 알고 있는지에 대해 이 정도로 깊은 회의감을 가졌던 적이 살면서 처음이라 당혹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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