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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Aug 16. 2019

언어의 기능에 대한 단상

'언어'의 쓰임에 대한 잡다한 생각

 일상적으로 모든 대화들은 언어로 행해진다. 그 대화들 속에서 엿보이는 첨예한 갈등에 대해, 그를 부추기기도 하고 중재하기도 하는 말들은 모두 언어의 기능이다. 역사적으로도 모든 사건들의 중심부에는 언어가 위치하고 있었다. 언어의 중요성을 부각하기 위해 첫 운을 띄운 것이지만,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가끔 잘 쓰인 문장의 난해하지만 휘황찬란한 낱말들이 이 세계의 사태를 완벽하게 적중시켰을 때 그것을 이미지적으로 환원해 이해하는 쾌감들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때마다 언어는 '세계의 거울상'이라는 전기-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이 다시금 의식 속으로 회부된다. 그리고 이 속에 담긴 진리란 감(sense)로 환원되지 않는 언어란 뱉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3차원 공간을 인지하지만 인간의 두 눈은 쌍안시로 2차원적인 이미지를 인식하는 듯하다. 그리고 정신에서는 2차원적 이미지들을 재현한다. 그 상들을 언어를 통해 지칭하고 또한 언어는 이미지를 불러오기도 한다. 우리가 쓰는 제각각의 맡말들이 어떤 대상들을 지칭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이는 독서를 하거나 글을 쓸 때 그리고 대화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언어는 이 세계의 무언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은 이 세계의 것이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이 세계의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철학이 '진리'에 대해 말하려 하지만 그것이 이 세계의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진리'라는 것은 아예 언어로 말해질 수조차 없는 것인가? 이것에 대해 가타부타한 말들을 늘어놓아 봤자 지지부진할 뿐 별다른 소득을 얻을 순 없다. 하지만 우리가 언어에 항상 의존해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는 부정할 수 없다.


 삶에 깊이 있게 침투해 있는 언어가 사라진다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많은 곤욕들을 치르게 될 것이다. 언제나 언어란 나의 생각을 대체하는 도구이면서 애매모호한 상태들을 적중시키는, 이는 마치 아직 이름이 불려지지 않은 어두운 밤들을 밝히는 번개와도 같다. 또한 언어가 복잡하게 뒤섞인 생각들을 유연하게 배치하도록 도와주고, 날카로움을 부드럽게 만들기를 스스로 요구하는 듯하다. 본질적으로 내가 직접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것들이 곧 나의 세계이다. 문자 없이 어떻게 정신이 영위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은 불가능을 바라본다. 그 질문조차도 언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이라는 것을 항상 언어로 한다는 사실에서 벗어나기란 어렵다. 


 이런 언어가 주는 편리함의 명증성이란 소통이라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더욱 면밀히 두드러진다. 나와 대화가 가능한 타자의 존재는 어떤 교접하는 부분도 없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나와 비슷하다는 느낌-그것이 환상적이거나 또는 허상일지라도-을 선사한다. 나는 타자를 통해 나의 인식 수준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 지평을 발견한다. 이를 제시하는 것은 언어적인 일치이고 또 언어 자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만남의 신비스러움이 저지되고 은폐되는 것이 언어적 불일치이다. 대화 속에서 대화의 참여자들이 언어를 사용하는데 그것이 뒤틀린 채로 아무것도 의미 있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 이 심급의 문제들을 창발하는 이유는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각자가 말하고 이해하는 언어가 같은 대상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다른 대상을 지칭한다면 소통이란 이루어질 수 없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술적인 기교를 부린다고 해보자. 그 사람은 화려하고 멋들어진 기술들을 선보이며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그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그것에 매료되어 있다는 표정들로 가득하다. 그는 손에서 불을 뿜어 내기도 하고 물을 갑자기 얼려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메마른 땅 위에서 갑자기 새싹이 돋아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한다거나, 손을 몇 번 휘저으니 손상돼있던 물건이 처음의 만들어졌던 본래의 말끔한 형상으로 되돌려 놓는다. 사람들은 그의 손동작 앞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환호성을 내지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의 신비스러움 앞에서 관중들은 묘한 기분을 감추지 않는다. 그렇게 공연이 막을 내리고 기교를 부린 사람은 자신을 소개한다. 자신을 '마법사'라고 칭한다. 그러자 반응들은 시큰둥해진다. 갑자기 몇몇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을 던지고, 몇몇 사람들은 야유를 보내고, 몇몇 사람들은 무관심으로 등을 돌린다. 그가 '마법사'라고 말하는 것은 무언가 잘 못됐다는 느낌이 든다. 


 관람객들은 그를 '마술사'로 이해하고 있었다. '마법사'는 신화적인 소재이다. 가령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라던가 '해리포터'를 연상할 수 있겠지만, 그들이 허구의 캐릭터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마법사의 실존은 사람들에게 불신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은 자신의 이해에서 인식 범주를 형성하고, 인식 범주 내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해 가능한 것들만이 믿음을 형성한다. 마법사란 단어로 영화 속의 캐릭터를 연상할 수 있는 이유는 둘 다 '허구'라는 공통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마법사는 거짓말쟁이인가? 만약 마법사가 마술사가 아닌 진짜 마법사라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처럼 대화란 '나와 너'의 구조에서 어떤 대상을 같은 의미로 지칭할 때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대화의 두 참여자인 '기교를 부리는 자'와 '대중'이 동일한 낱말의 의미로 동일한 대상을 지칭함에 따라 소통이 가능하다. 이는 사회적인 통합을 가능케하는 'Logos', 즉 합리성의 가장 극대화된 모습으로 각각의 개체들이 공통된 평평함 안에서 존속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헤겔을 비롯하여 합리주의 그리고 절대 이성을 예찬하며 사회의 지대한 평온을 꿈꾼 자들이 유토피아적으로 바라본 것은 이런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 어느 정도는 알다시피 현실은 항시 불일치적이다. 한 번 즈음은 누군가와 대화가 통하지 않아 갈등을 겪은 적이 있지 않은가. 이런 일들인 부지기수이다. 사회의 구조란 욕망이 난잡하게 뒤섞여 있으며, 서로 각기 다른 목적 체계 속에 우선적으로 자신을 생각하는 생명의 본능이 실현되는 곳이다. 정체성을 형성한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실존이 앞선다. 그렇기에 언어를 사용함에 따라 타인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반면에 내가 타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렇듯 애당초에 완벽한 통합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성서에서 '바벨탑' 일화는 이 세계의 언어가 분화된 원인이다. 하늘에 닿고 싶은 인간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탑을 세웠다. 이를 본 신이 그들의 오만함에 분개하여 그들의 언어를 모두 다르게 하였다. 그러자 작업에 참여하려는 자들은 소통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더 이상 탑을 쌓아 올릴 수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일을 할 때 분명 협업을 통해 더 많은 것들을 이루어낼 수 있음이 확실하지만,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뒤섞이고 혼란한 상태에서의 협업이란 불가능하다. 어떤 둘 이상의 집합체이거나, 아니면 최소한으로라도 둘 이상의 모여 있다면 다른 두 양상의 욕망이 대립할 여지가 다분하다. 그리고 이 양상이 깊어져 갈수록 함께 나아가자는 말은 공허하고 피상적인 선전 문구에 그치고 만다. 완벽한 일치란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오래전 유엔미래보고서에서 세계는 앞으로 점점 통합되어 갈 것이라고 언뜻 본 기억이 있는데, 이는 칸트 법철학의 중핵이자 가장 이상적인 윤리관인 '세계시민주의'이기도 하지 않는가. 하지만 지금의 양상을 보면 전혀 가능성이 없는 말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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