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군가들이 소유한 것에 대해 쉽게 부러워한다. 나는 갖고 있지 않지만, 타인이 가진 것을 보고서 부러움을 느낀다. 우리는 또한 그것을 가지려고 한다. 욕망한다. 그런데 만약 내가 부러워하는 것이 나에게도 충분히 있다면 부러움이라는 상태에 빠질 이유가 전혀 없다. 부러워하는 것이 그럴 수도 있는 것일까? 부러움은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일까?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살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또한 사회적으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내가 사회에 속해 있다면 불현듯 솟아오르는 이 감정을 마주할 일이 빈번할 것이다. 특히 상대적인 박탈감이 만연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은 시기심에 따른 골도 더욱 깊게 파여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점차적으로 번져 공동체 전체에 만개할수록 합리성의 틀은 무너진다.
'부러움'은 흔하게 접할 수 있다. 당장에 내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렇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돈의 논리가 한정해 놓은 어딘가에 살면서 돈에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그 증표로 오죽하면 '물질 만능주의'나 '물신주의'라는 말이 나왔을까. 이런 표현들은 부러움과 동시에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한다. 그런데 우리가 무언가를 부러워할 때 그 부러워하는 대상에 대한 본질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를 덮고 있는 외양적인 결과물만 보고서 부러워한다. 그리고 인간이 무언가를 부러워함에 따라 연역되는 두 가지 양태가 있는데, 하나는 '존경심'이고 하나는 '분노'이다.
부러움과 존경심이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 둘의 실제적인 구성 원리를 따져 본다면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둘의 공통분모로 발생적인 관점에서 결핍을 현전한다는 것이다. 이 둘 모두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주체의 욕망이다. 부러움이 대상에 대한 지향성이듯이 마찬가지로 존경심 또한 대상에 대한 지향성이다. 만약 내가 존경할만한 누군가가 가진 역량이 나에게도 있다면 그 사람에게 존경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게 된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존경할만한 사람들은 노력의 가치를 숭고하게 빛낸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경외심을 가질 정도의 사회적인 '옳음'을 행하는 사람들이다. 존경할만한 사람들은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받으며 타인에게 박수갈채를 받는다. 하지만 반면에 이 부러움이 분노로 번져가기도 한다. 강한 부러움을 영위함에 따라 인간은 그 부러움의 대상에게 질투를 느낀다. 이것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에 대한 어떤 숙고도 거부하게 된다. 인간이 불쾌한 감정에 빠져 있을 때 어떤 반성의 기미조차 갖지 못하는데, 이는 자신이 무기력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부러움은 불쾌함의 항이다. 이를 꽉꽉 채워 넣다가 공간이 부족하여 흘러넘치게 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행동 방식은 질투하는 대상에 혐오스러움을 덮어 씌어서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를 욕망의 과도한 축적으로 인한 공격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유무에 관계없이 자신들의 악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어떤 명분이라고 들이밀게 된다. 그리고 종래에 내가 부러워하는 대상이 사라지면, 더 이상 자신이 그것을 자연스레 의식하지 않게 되면서 자신은 평온함을 되찾게 된다.
롤스의 '합리적인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손해만 입힌다면 자신의 손실도 선뜻 받아들이려는 그런 자가 아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우연하게라도 자신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진 것을 알거나 눈치채더라도 실망하지 않는다. 아니면 적어도 자신과 타인의 격차가 어느 정도를 능가하지 않는다면, 현존하는 불평등이 부정의에 근거해 있거나 또는 어떤 보상적인 사회 체계와도 무관한 우연성의 결과라도 실망하지 않는다.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가능한 한 자신들의 목적 체계를 증진시켜주는 원칙들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를 위해서 가장 높은 지수의 사회적 기본 가치를 스스로 얻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내용에 상관없이 그들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증진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은 상호 간에 이익을 주려고 하거나 손상을 끼치려 하지도 않으며, 그들은 애정이나 증오에 의해서 마음이 흔들리지도 않는다. 또한 그들은 서로를 비교하여 더 많은 것을 얻으려 하지 않으며 질투를 하거나 잘난 체하지도 않는다. 당사자들은 승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목적 체계로 판단하여 가능한 한 많은 점수를 따는 데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 John Rawls 정의론 -
외향적인 것들에 치중하는 인간은 주변의 상황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타자의 질서를 따라 자신을 이끈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종종 하는 말로 '신경 끄고 너 할거나 해'라고 말을 한다. 특히나 악의에 찬 과도한 관심을 갖고서 부정성에 매몰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타인이 이를 수용하든 안 하든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인간은 단순하게 타인에게 어느 정도로 무관심한 채 내가 하고자 하는 일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이유는 앞의 말에서도 이미 명료하게 드러나는데, 즉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어느 철학자가 우리나라의 문제를 '의미 없는 삶'을 이야기할 정도이겠는가.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이방인으로 던져져 있기 때문에 부러움을 느낀다. 부러움은 주체성의 결핍과 무기력한 삶을 의미한다. 합리적인 인간은 주체성을 함양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결코 아니다.
롤스의 정의관에서는 정의의 1원칙으로 최소 수혜자에게 최선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무래도 시기심과 질투가 넘쳐나는 이유는 어느 정도의 삶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부러움이 온전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 때는 존경할만한 대상이 아닌가. 분명 어느 누구나 보편적으로 좋아할 만한 일이 있기 때문에 어떤 가치를 추종해야 하는지 또한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일하게 부러움에 의한 파괴적인 성향이 의분일 수가 있다면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을 때이다. 하지만 도덕적 잣대를 폭력적으로 휘두르면서 타인의 가치를 절하시키는 것이 과연 옳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들이 타인의 삶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원형에 맞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애석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