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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ul 20. 2019

'영혼'에 대한 의미와 인식적 한계

풀리지 않는 의문을 끌어안는 일

 로고스(Logos)의 의미는 '이성', '논리', '말' 정도로 이해된다. 일상적으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그리고 누군가를 굳이 만나지 않더라고 언제나 언어를 사용해서 사고를 하고 말을 한다. '이성'보다 '논리'와 '말'은 로고스의 가장 근접한 정의이다. 


 이성적 사고란 어떤 대상을 분석하거나 예측하는 것들을 모두 포섭하는 총제적인 의미 작용이다. 어느 누구나 특정한 표현을 통해 사회적 내규를 포괄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다. 그런데 '객관적'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나의 동의를 얻어낸 주관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객관을 양적 주관, 즉 대다수의 찬동을 얻어낸 것으로 규정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견에 객관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있을까? 그런 것들, 다시 말해 진리 명제라 일컬어지는 것들이 있다고 한다면 더 이상 원인을 캐물을 수 없는 지점에서 성립할 것이다. 우리가 '객관'이라 말하는 것들이 요구되는 이유는 일치를 이루기 위함이다. 언어는 본연적으로 소통의 기능을 전제하는데, 일치하지 않는 언어는 다수 간의 갈등만 부추긴다. 그런데 절대다수가 자기 자신이 믿고 있는 지적이라 할 수 있는 전제들에 대해 맹목적인 믿음을 형성하지 않는 이상에는 완벽한 일치란 이상향에 머무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성적으로 영적 존재에 대한 유무를 논할 수 있는가? 변신론은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후 끝이 났다. 여기서 쓰일 개념들을 논한다는 건 사적인 믿음에 의존해 있기 때문에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항상 무의미하다. 그런데 인간 존재는 실체가 아닌 관념들에 사로잡힌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수많은 철학서에 등장하는 '영혼'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만약 어떤 누군가가 이 개념과 상충하는 관념을 내재하고 있어 이를 철저히 터부시 한다 해서 이 개념의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거나 아니면 사이비의 만행들에 의한 사회적 피해 사례들을 직간접적으로 수용하면서 의미보다는 기호 자체만으로도 거부감을 형성한다. 아니면 칼 세이건의 과학의 대중화라는 원대한 꿈처럼, 미신적인 믿음들을 거두기 위한 목적의 일환을 긍정한 사람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개념은 수만 년이 지난다 할지라도 유효하다. 인간의 지각 수준의 여부를 떠나 우리는 관념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의미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예컨대, '정의'란 무엇인가? 헌법인가? 법원 건물인가? 경찰의 공권력인가? 이국종 교수님의 운위이거나 아니면 그 존재함 자체라고도 할 수 있을까? '정의'라는 관념을 적중시킬 수 있는 물질적인 대상은 없다. 추상적으로만 그리고 현상적으로만 이해될 뿐이다. 이뿐만 아니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예를 들면 수두록하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에 대해서 논한다.


 사실, 내게 말하며 내가 응답하거나 질문하는 존재는 내게 자신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 존재는, 내가 이 현현을 떠맡고 내 내면성의 척도에 그 현현을 놓으며 그것을 나-자신으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시각은 대화 속에서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이 같은 방식을 작동시킨다. 시각은 사실 본질적으로 외재성을 내면성에 합치시키는 것이다. 거기서 외재성은 관조하는 영혼 속으로 흡수되며, 적합한 관념으로서 선험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의미부여의 결과가 되고 만다.
- Emmanuel Levinas <전체성과 무한> -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무언가를 말함으로써 눈 앞에 드러낸다. 이것이 '영혼'의 개념에 담겨 있는 함축적인 의미이다. 또한 귀추가 모아지는 점이 있다면 이 개념이 인류의 모든 지식의 발원지라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물음을 캐물을 때, 더 이상 물음을 던질 수 없는 경계는 침묵이 시작되는 곳이다. 자기 원인, 존재, Cogito, 창조의 근원 등, 스피노자, 하이데거, 데카르트, 니체와 같은 수많은 지성들이 이것에 대해서 이해하고 자신들의 방법론을 설파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그것 이상으로 무언가를 논할 수 있었는가? 그곳은 빛이 방출되는 곳이지만, 빛이 닿지 않아 어두운 곳인가 아니면 너무나도 밝아서 볼 수 없는 곳인가.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결국 언제나 비트겐슈타인의 <논고> 마지막 명제로 돌아온다. 그는 인간의 인식과 지각 수준으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명석하게 지적한 것인가. 아니면 본인의 한계점에 대해서 밝힌 것인가. 시대적으로 양차 세계 대전을 겪은 후, 철학의 큰 테두리를 규정하고자 한 위대한 지성인들은 무의미한 담론을 제거하기로 했다.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 중 단연 가장 돋보이는 비트겐슈타인도 '말할 수 없는 것'을 확실히 인지했지만 그 이상에 대해서 이 세계의 언어로는 밝힐 수 없었다. 침묵이 시작되는 곳은 또한 침묵해야 하는 곳인가. 허무함은 무의미한 반복 속에서 태동한다. 고뇌로 지친 삶을 살면서 그가 죽음을 고대했던 이유는 그 또한 풀리지 않는 이 세계의 비밀에 대해서 항상 의구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당연지사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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