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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ul 20. 2019

'불가능' 개념의 사적인 발전 궤도

완벽한 불가능이란 생각하지 않은 일이다.

 '불가능'이란 단어를 맨 처음 생각했을 때는 군대를 전역한 후이다. 그 당시 불가능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마 나폴레옹의 말이 나의 기운을 배가시켰기 때문이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 그의 용맹하고 위풍당당한 삶과 작은 키에 반해 마음속의 우상으로 자리했다. (키가 실제로 몇이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나는 그냥 나와 비슷한 키라고 믿겠다) 그는 나의 영웅이었다. 나폴레옹이 도덕적 관념보다는 권력이라는 사리사욕에 치중하면서 베토벤과 헤겔에게 실망을 안겨준 것보다는 그의 위상이 더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현실의 벽이 꽤 두텁다는 건 겪어보고 알았다. 여태 겪은 일들을 찬찬히 살펴보아도 용기라 생각하던 것들이 무모함이었고 충분히 가능한 일 앞에서도 언제나 두려워했으니. 또한 그리 만족스러운 일이 없는 이유는 항상 불만족스럽기 때문이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말로에 씁쓸해했다. 결국 그 또한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6년간 유배 생활 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그때 처음으로 자신의 사전에서 '불가능'이란 단어를 발견하지 않았을까?


 고전을 섭렵하면서 라캉은 신선하고도 불쾌한 충격을 주었다. 단순히 나의 몰이해적인 측면 때문에 발생한 충격이었지만, 그땐 꽤 심각하게 나의 진실성에 대해 의문부호를 떠올리면서 진부한 나날들을 보냈다. 인간의 욕망이란 애초에 불가능이라는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에 앞에서 나의 욕망을 면밀하게 마주한 것이다. 그러고는 내가 가능하다고 상상한 모든 일들을 불가능하다고 규정 내렸다. 포기하는 건 꽤 쉬운 일인 듯하다. 불가능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책을 읽는 내도록 노골적으로 반목하는 감정을 품었지만 자학적인 시간일 뿐이었다. 과거를 훑어보면 불가능을  충분히 인지 할법한 일들이 수두록 했는데, 그 말 한마디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어찌 보면 말이 만들어 내는 거대한 울림이라는 신비로운 것에 제압당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불가능에 대해 마침표를 찍게 된 시점은 비튜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를 읽고 난 후이다. 잠언 형식으로 된 책의 몇몇 문구들을 가져와도 그의 천재적인 통찰력을 확인할 수 있고, 나의 주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편협하고 무기력한 지를 새삼 느낀다.

1.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1.1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3.01 참된 사고들의 총체는 세계의 그림이다.
3.02 사고는 그것이 생각하는 상황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생각될 수 있는 것은 또한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6.374 설령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말하자면 운명의 은총에 불과할 것이다. 왜냐하면 의지와 세계 사이에는 그것을 보증해 줄 논리적 연관이 없으며, 그렇다고 그 가정된 물리적 연관을 우리 자신이 다시 의지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6.375 필연성은 오직 논리적 필연성만이 존재하듯이, 불가능성도 오직 논리적 불가능성만이 존재한다.

 '세계'라는 표현을 모든 사람들의 각자성으로 대체할 수 있다. 즉 모든 '나'들이 갖고 있는 주관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이다. 우리가 세계라는 단어를 쓸 때 종종 지구나 우주와 같은 모든 개개인들이 공유하는 범적인 공간을 연상하기 쉬운데, 철학적으로는 경험적이거나 선험적인 내며의 차원을 의미한다. 하나의 '세계'란 사실적이고 확정적인 측면이나 무의식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우리는 경험적으로도 이해하듯이 자신이 얻은 지식이나 축적된 경험들을 참조점으로 삼아 선택을 하고 미래로 끊임없이 자신을 내맡긴다.


 선택은 미래에서 존재한다. 선택된 과거라고 한다면 우리의 행위가 쾌고의 반응에 의해 실현된다는 점에서만 합당한 표현이다. 이 표현은 의식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 의식적이지 않은 것들을 통해 미래로 자신을 기투한다. 그래서 선택에 가능성들이 따른다.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그런데 미래의 가능성은 삶의 연속적인 과정처럼 일종의 논리적 연역으로 구축되어 있다. 주체가 기대한 어떤 가능성이 미래에 충분히 실현되려면 그것이 자신의 내적인 상징성과 단단히 결합되어 있어야만 한다. 들뢰즈적으로는 자신의 역량을 차츰씩 확장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라캉에 이르러서는 시니피앙에 들어서지 않는 욕망과 그 공백을 드러낸다. 인간의 상상계적 특질들은 내재적인 상징적 연쇄 작용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된다는 빈자리로 치환되며, 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를 형성한다. 즉 상상적 차원은 방향성 개념을 시사하지만 그것은 상징적 차원에 의존해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만 해소된다. 즉, 내적인 성장의 강도가 빈약할수록 상상과의 괴리감을 충족시키지 못하며, 그 사이에 발생한 간격은 대체로 강박적이거나 허구적이게 될 뿐이다.


 하이데거에서는 미래의 가능성은 염려를 동반하면서 언제나 재차 물음을 던진다. 쉽게 말해 나의 계획에 충분히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 반문한다. 그래서 염려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가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가능성을 따져보며 골몰하는 일이 미래에 대한 불확정성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지만, 미래 자체가 불확정적인데 굳이 저항이 필요할 것인지 한 번 즈음 생각해 보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사유이지 않나? 그 자체로서는 이미 '불안'이다. 현존재의 현재는 과거로 끊임없이 편입되고 있다. 모든 지나가버린 경험은 곧 현재이고 지금의 나이며, 다가올 현재를 향해 새로운 문을 두드린다. 어찌 될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말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확실히 가능한 일이 무엇일까? 그 일이란 지금 행하고 있는 것들이다. 주체의 자리에서 수 세기를 걸쳐오면서도 불변의 위상을 차지하는 것은 말과 행동이다. 내가 오롯이 통제할 수 있는 건 나의 입과 내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실천적 영역이 전부이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자신의 세계를 변혁시키고 꾸려 나가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가끔 이 명료성에 대해 의심한다면 존재한다는 마저도 왜곡하려는 바보스러운 짓이다. 그리고 본연에는 인간의 생각이 있다. 사고 작용으로 고려해볼 만한 상황들은 나에게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은 불가능한 일이며, 본질적으로는 생각하지 않은 일들이다. 내가 한 번이라도 염두해보지 않은 일은 항상 불가능한 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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