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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Aug 25. 2019

과도한 자기 암시의 역효과

자기 암시가 만들어내는 불행과 역치

 사르트르는 '현상학적 환원'만 거친다면 초월적 주체를 굳이 상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의 관점에서는 주체적인 삶과 그 역량을 보존하는 데에만 주력하면 되지, 굳이 답을 구할 수 없는 난해한 물음을 물고 늘어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가령, '자아'라는 관념에 대응하는 실체가 있느냐는 물음과 같은데, 인간의 지성에 관한 논의로 로크는 '관념은 실체와 대응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정의를 충족시켜야만이 그것을 지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아'라는 개념은 잘못된 지식에 불과한가? 여기에 대해서는 니체의 답변을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얼토당토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우리는 그것의 실체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더 명확하고 새롭게 제시해야만 한다. 이것을 정의하는 일이 권리상의 실재에 그친다 해도 말이다. 형이상학적 존재에 대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최초'라던가 '초월'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종국적으로는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것들이 이 세계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하는가에 대해서 시사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타인에게 나에 대해 표현하듯이, 나는 나에게도 말을 건넨다. '나와 나'의 관계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런데 흔히들 '나는 나를 사랑해'라던가, '나는 나를 좋아해'라는 말을 서슴없이 뱉을 수 있다. 그리고 이 구도에서 명백해지는 것은 나의 존재가 '나'를 바라보는 관점이 나의 존재가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즉 타인을 바라보는 기준들은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만약 어떤 사람이 나에 대해 비판이나 의심을 늘어놓으면서 시비를 가리길 원한다면 그것에 대해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그 어떤 사람도 자기 자신에게 그대로의 비판과 의심을 늘어놓는 사람일 테니까. 그 와중에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남에게 엄격하면서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의 경우인데 그 사람은 금방 자기 자신이 이기적인 방종에 빠져 있다고 만인에게 들통이 날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받지 못할 것이다.


 응시 속에서 명확해지는 기준에 대해 인지할 수 있는 행로는 암시들을 확인할 때이다. 가령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고 규정할 때, 내가 나에게 건네는 말들을 마치 거울을 보면서 말을 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는 주체가 미래를 향해 던지는 물음 속에서도 밝혀진다. 미래는 미심쩍기만 한데, 우리는 항상 미래에 내가 어떤 일을 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그리고 존재가 미래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기 위해서 반드시 괴리감을 감내해야만 한다. 만약 어떤 목표나 계획을 수립하게 되면 그것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아니고 미래에 발생할 일에 대한 말들에 불과하다. 그래서 미래란 언제나 착각이 될 수도 있고 환상이 될 수도 있는 여지가 함께 놓여 있다. 또한 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는 나의 행동들이 객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미래에 추측된 사유의 방대함에 따라 자신에게는 그 부피만큼의 부담이 주어진다. 이는 대상에 대한 하나의 세례라고 망상할 수 있지만, 이 구조가 주체의 내면성을 발전시키는 행로를 결정짓는다. 구조 속에서 주체는 항상 자신에게서 소외되어 있게 된다. 인간은 이를 결코 그만둘 수 없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에 대한 암시의 흘러 넘침이 실재성에 근거해 있지 않을 때이다. 인간은 실재적인 차원에서 살아가는데, 자신의 주변 현실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서도 자신만의 이해 방식 속에 착안될 수 있는 것이 상상의 권리이다. 하지만 이 간격을 무마시키지 못한다면 어떤 조망된 미래라 할지라도 자아에 포섭될 수 없고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그런 것들은 저 멀찌감치 떨어져 덩그러니 놓인 채 나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건네질 않는다. 그리고 소외 구조가 계속될수록 나 자신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최악으로 변질된 가장 애석한 상황은 타인에게 구차하게 변론을 늘어놓는 상황이다.


 암시라는 건 꽤 많은 것들이 합리적이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합리화된 양태로만 구성된다. 나에 대한 암시가 만들어내는 효과는 분명 존재한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는 일을 마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믿음과 동기를 생성하는 것이기도 하며, 이는 '힘에의 의지'이지 않는가. 하지만 내가 목표로 삼은 일을 완수할 수 있다는 것과는 별개이다. 어떤 일을 하든 간에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그런데 과도하게 자신을 계상함에 따라 어느새 부담만 가득히 쌓여 있게 되면 인간은 어느새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다. 임계치를 넘은 암시는 존재를 무기력으로 밀어 넣는 치명적인 독이다. 프로이트의 여정으로 독일의 절대적 관념론이 왜 실패하는 지에 대한 의심을 통해 '무의식'을 발견한 것과도 같다. 작금의 시대에서 가장 실효적이라 할 수 있는 선전 문구로, NIKE의 'Just do it'은 행동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텍스트이다. 동기 부여를 위해 이 광고 문구를 떠올리기만 해도 이 브랜드가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엄청난 광고 효과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용기를 북돋아주는 이 말 뒤에 왜 행동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원인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를 애매하게 덮어버린다면 내가 가진 섬광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력이 가장 숭고하게 치부되는 시대에 우리는 노력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노력하지 못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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