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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Aug 28. 2019

광고와 철학의 유비 관계

무의식적 욕망의 환원과 이면의 진실에 대해서

 이 세계에서는 행복이나 즐거움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들보다는 고통이 더욱 진실에 가깝다는 사실은 합당할까? 의미 있는 논의를 진척시키기 위해 하나의 관점을 제공하는 것은 꽤 위험하다. 이런 말들을 남발하는 건 경솔한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간혹 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건네면 괜히 민감해지는 분위기와 상대방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마주하는 건 어렵지 않다. 또 나의 입이 침묵을 감행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나도 모르게 온몸의 신경들이 타인의 얼굴을 거부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무언가에 대해서 말을 할 때 엄밀해야 한다면, 이 세상이 행복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말은 얼마나 의심스러운가. '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다!'라는 말과 '이 세상은 행복으로 가득하다!'라는 말 중 어느 것이 더 옳아 보이는가? 행복이나 행운보다는 고통과 고난을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어느 누구나 경험적으로라도 인지하고 있는 자명한 사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테가 천국에 대한 서곡을 쓰는데 어려움을 느낀 것은 이 세상에 행복하다 할만한 사실을 쉽사리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신'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안락을 찾고자 하는 종교적인 시도도 고통스러움에 대한 항변일 뿐이다. 어찌 보면 철학적 견해가 무진장 거창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위적이다.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볼 수 있는 것도 넓어지기 마련이니까. 언어의 힘은 선험적인 차원이다.


 앞서 언급한 세상의 고통에 대해 재차 환기하자면, 이는 어느 누구나 자신이 겪고 있는 곤욕-그것이 크던 작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들에 몰두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희망적 사고를 의욕한다. 200년 남짓한 시간 동안 지성들이 이끈 사유의 흐름도 동일한 맥락을 구성한다. 쇼펜하우어 이후에 니체, 프로이트, 포스트-모던, 그리고 하이데거의 사유가 도래한 것은 전혀 우연적이지 않다. 그들은 명백히 존재하고 있는 고통에 대해 대처하는 태도를 주창한 것이다. 그런 사유들은 개체들의 의식을 방향 지어주는 역할을 한다. 인간은 관념적인 존재이고, 어느 누구나 자신이 믿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 믿음이라는 것이 교의적으로 머무르는 신앙심이 아니다. 믿음은 존재의 축으로, 가령 어떤 신도 믿지 않고 어떤 종교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는 그런 것들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근원적이고 사태와의 연관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는 광고가 기능하는 방식과도 동일하다. 차이가 있다면 매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보들을 소비자는 자동적이며 무반성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그곳에서 자발성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여러 매체들에서 흘러나오는 광고들은 다양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제공한다. 예컨대, 개그맨들을 통해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를 부각해서 무의식에 밀어 넣거나, 유행이 될만한 간단하고도 진부함이 반복되는 음악을 사용한다. 아니면 꽤 일상적이면서도 황홀하고 낭만적인 이미지들을 선사하기도 하고 기술적인 기능에 대해 강조하기도 한다. 그중 단연코 으뜸이라고 생각되는 건 희망의 말을 건네는 광고가 아닐까.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어떤 광고는 '나는 오늘 퇴사했다'라는 문구와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신나게 춤을 추는 모습을 소비자들에게 보여 준다. 이 텍스트만 보아도 퇴사를 했거나 하려는 사람들을 겨냥한 광고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보는 사람들은 자유로움을 한없이 발산하고 있는 모습과 마주한다. 만약 오늘 내가 퇴사를 했다면 나를 구속하고 있던 힘에서 풀려난 상태이고, 마침 이 광고를 접했다면 그 브랜드 맥주는 은연중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물론, 굳이 광고에서 홍보하는 브랜드의 맥주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꾸준히 충성하고 있는 브랜드가 있다거나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취향의 맥주를 소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또 다른 의미에서의 자유이니 말이다. 반대로 퇴사를 하지 않았다 해도, 그 광고의 차원에서 제공되는 이미지는 나의 욕망을 자극한다. 그 자유로움은 감춰져 있던 퇴사에 대한 은밀한 욕망을 자극한다. 이를 통해 충동적으로 퇴사를 결정할 수도 있고 또한 유보시켰던 욕망을 앞당길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시되는 것은 희망의 이편에 놓여 있는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꿈처럼, 광고는 상상적인 가능성을 정하고 그 방향을 바꾼다. 꿈처럼, 광고의 실제 특성을 엄밀히 말해서 주관적이고 개별적이다. 또한 꿈처럼, 광고는 부정성도 상대성도 없으며, 많든 적든 표시도 없다. 광고는 본질적으로 과장되고 실제로는 완전히 내재적이다. 우리의 밤의 꿈이 설명되지 않는 반면, 도시의 광고 게시판에서, 신문에서, 스크린에서 우리가 경험한 것은 온통 설명과 자막들이다.
                                                                                                        - Jean Baudrillard 사물의 체계 -


 인간은 관념적인 주체로서 행위한다. 이미지와 텍스트의 차원에서 삶의 진척이 이루어진다. 이는 광고가 소비자에게 접근하는 경로와 동일하다. 광고는 이를 본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마치 그것이 나에게 꼭 필요한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줄 수 있다는 듯이 손짓한다. 하지만 광고에서는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명구처럼 멀리서 보이는 희극적인 면모들만 과장되어 있다. 앞서 예시로 든 광고처럼 퇴사 후의 해방감과 즐거움을 묘사하는 반면 앞으로 다가올 일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에게는 반복되는 부담과 고통일지도 모를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퇴사를 감행하기보다는 고생 끝에 낙이 오기를 기다리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를 일인데도 화려하게만 포장되는 것이 광고이다. 광고는 꿈같은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삶의 행로를 결정짓는 그런 장면과 문구들 말이다. 이편에 놓여 있는 진실에 대해 밝히는 것보다 유희적인 것들과 희망적인 것들을 던져주는 것이 옳다. 그렇지 않은 모든 것들은 인간에게 해롭기만 하다. 아예, '맥주 한 잔'에 모든 걸 떨쳐 버리라는 식의 어쭙잖은 위로를 건네는 게 더 좋았을 것 같다. 실제로 술의 기능이란 '망각'을 돕는데 쓰인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반면 비극을 강조하는 느낌의 광고는 얼마나 반응이 뜨거울까. 이것의 대표적인 예시로 담뱃갑에 그려진 혐오스럽고 슬픔을 불러오는 이미지들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킬만한 끔찍한 사진들 말이다. 그래서 흡연율이 줄어들었는가? 흡연자들은 오히려 그런 것들에 불편함을 느끼고 반감을 느끼는 중이다.


 광고는 어떤 이미지와 텍스트들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방향의 행로를 제시한다. 철학이 말들을 통해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거창하게 늘어놓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사물들이, 인간의 문명에 제공해주는 편리함 속에서 우리의 삶을 꾸려나가고 지속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사물들이 나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질 않는다면 그 사물은 가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까 맥주 광고의 이미지와 텍스트들에 대해 간략히 기술했는데, 브랜드가 무엇인지는 떠오르지가 않는다. 여러 사물들과 그에 관련된 광고들이 넘쳐나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런 것들을 모두 없애버린다거나 하는 건 불가능하면서도 합당치 않다. 이미 사물은 우리의 욕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이 세상의 허무함을 가리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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