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필요할까 싶어 반대했던 건조기 덕에 언제고 보송보송한 옷을 입게 되었다. 간사한 게 사람 마음이라더니 젖은 빨래를 널고 말리는 수고는 금세 잊고 매번 필터를 청소하는 게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세탁에서 건조까지 일사천리로 처리된 빨래가 곱게 개어지길 바라는 것은 편할수록 더 편하길 바라는 인간의 심보이다.
건조기의 소복이 쌓인 먼지 필터를 향해 청소기를 틀었다. 흡입력이 약해졌는지 먼지가 빨리긴커녕 풀풀 일어난다.
'먼저 청소기를 청소해야겠군.'
먼지떨이 통을 비우려고 오른손을 본 나는 경악했다. 내 손에 들린 기분 좋은 그립감의 물건은 청소기가 아닌 드라이기였다. 청소기로 착각한 드라이기를 총처럼 들고 쏘아 댄 바람에 회색 먼지 송이들이 욕실을 난다.
회의가 열리는 장소는 주차장이 협소한 탓에 일찌감치 도착해 출구 쪽에 주차했다. 예정보다 회의가 일찍 끝났지만,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긴 애매한 시간이라 근처 마트에 들렀다가 퇴근할 생각이었다. 출구를 나선 차창으로 강렬한 햇살이 쏟아졌다. 첫 번째 신호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왜 여기 있지?'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고 정면을 보다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한창 근무 시간에 밖에 나와 운전석에 있는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첫 번째 신호를 지나 두 번째 신호까지 직진하고 세 번째 신호에 걸릴 때까지도 도통 떠오르지 않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길은 아는 길인데 이 시간에 운전하고 있는 이유를 당최 알 수 없었다. 심호흡을 하고 오늘 아침부터 기억을 떠올렸다. 평소처럼 일어나 출근해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며 어제 병가였던 직원과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그게 어제인지 오늘인지 확실하지 않다. 입이 마르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얼른 엑셀을 밟고 출발하는 찰나 회의장 주차장을 나오는 운전석의 내 모습이 차창에 오버랩됐다.
‘아. 출장이었지.’
마침내 안도의 숨을 쉬며 유턴하기 위해 차선을 옮겨 탔다. 갑자기 낯선 세상에 방향을 잃고 도로에 내팽개쳐진 그날은 잠깐이었지만 완벽한 공포였다.
브레인 포그 현상 : 머리가 멍하고 맑지 않다. 집중이 안 되고 생각한 것이 잘 표현되지 않는다. 기억력이 저하되고 문장 이해력이 떨어진다. 눈이 침침하고 자주 어지럽다. 소화가 잘 안되고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말이 어눌해지고 사고 능력이 떨어진다. 자주 우울하고 특별한 이유 없이 몸이 불편하다.
노화 현상은 얼핏 뇌 질환 초기 증상과 비슷하다. 건강 검진에서 이상 없고, 아직 코로나 확진이 아니니 후유증이 아닌데도 생각대로 표현되지 않는 어눌한 말이 골치다. 회의 석상에선 변론하는 변호사 같다며 법학과 출신이냐고 질문받을 만큼 막힘없던 입담이 언제부터인가 더듬거려졌다. 생각 따로 말 따로 인 셈이다.
‘사과가 덜 익어 붉은 기운만 감도는 게 시어 보인다’ 가‘음. 사과 시다. 안 익었나 봐. 그런데 빨개.’맥락 없이 끊어지는 단문과 순서 없는 말로 튀어나온다. 말하다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잊어버려 삼천포로 빠지는 일도 다반사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드라마 주인공에게 공감하고 자꾸 딴 말 하는 노인이 남 같지 않은 지금, 신이 노화를 선물했다. 늙어감을 알리는 알람이 아쉬운 게 아니다. 처지는 얼굴과 주름살은 나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아무렇지 않다. 오히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나 보아줬으면 했던 옷차림에서 벗어나니 한결 편하다.
'우리가 늙어줘야 젊은 사람이 빛이 나지.'
나이 듦을 서글퍼하는 또래에게 말했다.
'그래봐야 아직 오십인 걸. 반 밖에 안 살았어.'
노화도 생각하기 나름이다. 체력이 달리니 낮 동안의 일과 감정에 밤잠을 설치지 않고, 차곡차곡 쌓은 경험 덕에 곤란한 상황에서 흥분하지 않고 생각할 수 있다. 건망증 때문에 말과 행동을 삼가하고, 마음처럼 되지 않음을 알게 되니 한 발짝 물러서는 양보를 하게 된다.
젊음이 저만치 물러가자 물러난 자리에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인다.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외쳤지만 그저 변두리였다. 삶은 내가 아니라 모두가 주인공이다. 현타(현실 자각 타임의 줄임말)를 주는 노화는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혜안의 문이다. 신이 모두에게 이런 선물을 준비한 이유는 어쩌면 마지막 순간에 인간이 인간답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