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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딴따라 Feb 02. 2023

무자비한 노동의 너무한 이야기

<쇳밥일지>, 천현우

프롤로그 제목은 <회색 미래>다.

'찬란한' 혹은 '밝은' 미래는 어쩐지 강요된 희망 같다. 앞날을 말할 땐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우리 사회에 깔린 암묵적인 약속인 셈이다. 선택권을 쥔 금수저와 타고난 재능, 머리를 가진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에겐 회색 미래가 익숙하다. 장을 본 물건을 들었다 놓게 되는 고공 물가와 팍팍한 뉴스, 통장에 찍힌 한 줄의 입금 다음에 꼬리를 문 출금 내역 아래엔 초라한 잔고만 남아있다.


21년 만에 처음으로 설 연휴뒤로 휴가를 냈다. '출근'을 위한 아침 기상이 지긋지긋하다 못해 끔찍해질 즈음이다. 휴가 동안 변한 건 '달라진 시간'이다.  8시 출근, 업무, 12시 점심, 업무, 2시 회의, 퇴근 후 야근으로 쪼개지던 시간은 아무 때고 눈을 뜨면 새 날이 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생각나는 대로 움직일 때마다 느리거나 조금 빠르게 흘렀다. 저녁 10시에 내일 7시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밤은 유연하고 부드러웠다  




"지방 사는 내 또래들의 장래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진로라는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적성, 보람, 가치, 사명, 비전 따위는 모두 가위질에 나가떨어질 잔가지. 공부 잘하고 못하고는 아무런 상관없었다. 다들 성적에 맞춰 대학교에 가거나 취업했다. 어차피 관성으로 택한 미래 속에서 아옹다옹 애쓰는 모습이 어쩐지 바보같이 느껴지던 시절, 그땐 짝지가 내린 결정의 무게를 전혀 몰랐다." -15p


실업계 고3인 주인공과 친구는 진로를 고민한다. 친구는 부사관을 결정한다. 우리 대가리로 철밥통 잡을라믄 방법이 그뿐이라는 친구를 보며 주인공은 일찍 어른 물이 들었다고 생각한다.


고3은 대학 진로를 고민하지만 대학이  취업의 직행 노선이 아님을 어른은 안다. 실제로 사회가 받아주는 대학 졸업장은 극소수다. 그럼에도  일단 들어가야 한다는 희한한 목메임이 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고3이지만 대학이 아닌 진로를 고민하는 청소년을 놓친다. 오히려 실업계라서 취업이 잘 된다며 대학 나와 전전긍긍하느니 기술을 배우는 게 낫다고 한다. 그 말속에는 대학 진로의 우선순위, 차선으로 밀린 기술을 하대하는 심리가 깔려 있다. 저자는 실업계 진학자에게 보장된 '취업'의 어설픈 현실을 어떻게 몸으로 버티며 살았는지를 낱낱이 보여준다.  


실업계나 지잡대를 나온 지방 청년이 제조업 현장에서 겪은 해도 너무한 사연, 부당함, 말도 안 되는 급여와 쪼들린 생활, 목숨이 쉽게 저당 잡힌 현장을 전전하다 '쇳밥'을 먹으며 용접 노동자로 살아온 삶은 젊은 층이 힘든 일을 기피해서 취업률이 낮다는 기성세대의 혀 찬 소리가 억지임을 증명한다. 제 자식에겐 중소기업의 무자비함을 겪지 않게 하려고 온갖 수단과 인맥을 동원하면서, 남의 자식의 주저함을 베짱이처럼 약았다며 제 자식과 선을 긋는다


"7,000원이란 시급은 내 비루한 상황을 타개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아무리 자존감을 키우려 해도 금방 찌질이로 돌아왔다. 말버릇도 점차 '어차피' '그래봐야' 같은 체념의 언어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p.172


"야간에 잔업 마치고 퇴근길이 고비. 버스 정류장을 지나면 전공 책 안고 시시덕대는 동갑내기들의 모습이 보였다. 대학생이 아니면 스무 살의 자격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친구들과 만나도 대화가 어긋나는 걸 느낀다. 여가가 거의 없는 삶이라 드라마나 영화 이야기에 끼지 못했다. 무엇보다 동갑들이 호소하는 '힘듦'의 기분에 도무지 공감이 가질 않았다. 당장 먹고 입을 게 없어 일터에서 죽살이 치는 삶을 살다 보면 "하다 하다 안 되면 공무원이나 하지 뭐"라고 말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참으로 철없게만 보였다. 세상에 나만 각다분하고 주변 사람들은 편하게 앉아서 공부만 하는 듯 보이던 그때, 우리는 그 상태를 '직장인 사춘기'라 부르기로 했다. p.240


저자는 끔찍한 노동의 당사자와 독자 사이를 잇는 중간자 역할을 하기로 한다. 당사자의 목소리가 없는 공론은 허상일 뿐임을 알기에 하청의 서러움과 재해의 위협에서 '장이'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 치열함이 흩어질 때마다  자신을 향한 세상의 냉소에 소리를 내기로 한다.



"중간 언어를 찾아야 하는데 니가 그걸 잘하더란 말이지. 노조 아재들이 이게 안 돼. 맨날 머리띠 매고 메가폰 잡고 소리만 치잖아. 간절한 건 이해하겠는데 촌스러워. 그림이 너무 구리잖아. 우리가 그리 욕해도 결국 가진 놈들은 먹물이잖냐? 그 먹물들이 원하는 양식미라는 게 또 따로 있을 거 아니냐. 우리 얘기를 먹물들 언어로 번역해야 해. 좀 아니꼬워도 세상은 그렇게 바꾸는 거지. 넌 그게 되더라. 그래서 니가 중요한 거야. 쇳밥 얘기를 먹물들 알아먹게 쓸 수 있으니까."



저자의 절절한 글은 뉴스에 나오는 산재 사고 때마다 어떡해 하며 일시적으로 커졌다 꺼지는 대중의 관심을 현장으로 밀착 안내한다. 그의 소리를 여기저기에서 귀를 기울이고 찾으면서 그는 책을 내고 인터뷰를 하고 미디어 스타트업 기자가 된다. 대학교 졸업사를 의뢰받은 그의 말을 들어보자.

 

"좋아서 하는 일에 타인의 평가를 의식할 필요가 없다."라고 했었죠? 타인의 평가는 본질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이를테면 간식 같은 거예요. 먹으면 맛있을 수도, 속이 더부룩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안 먹어도 그만이란 거죠. 오히려 남들 평가에 너무 신경 쓰면 '자의식 비만'이 와요. 남들 평가에 너무 신경 쓰다 보니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죠. 사람은 선플 백 개보다 악플 하나에 훨씬 민감하니까요. p269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선 무엇보다 냉소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분노나 증오마저 마음먹기 따라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지만 냉소는 그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 뿐이에요. 대상을 이해할 생각도 없고 공감하지도 못하니 무슨 발전이 가능하겠습니까. 냉소란 마음의 비만하고 같아서 떨쳐내는 방법은 단순하지만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남이 떠먹여주는 정보를 곧이곧대로 받아먹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보 과잉을 넘어 폭주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인터넷의 알고리즘은 편향된 정보만 나열해 주기 일쑤죠. 이럴 때일수록 자신의 사고로 움직이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 생각이 정답인지 오답인지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핵심 목적은 사고의 근육을 기르는 거니까요."-p272,273


화이트칼라든, 블루칼라든 지금의 청년은 결핍 시대에 살고 있다. 저자는 '쇳밥일지'에 지방 공장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녹이려 한다며 자기 몸에 불을 지르거나 0.3평 철창 감옥에 스스로 갇혀야만 비로소 존재를 인정받는 현장 노동자들. 그 노동자들이 유별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말이 통쾌하면서 가슴이 아린 건 나 역시 그들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새해가 되자마자 난방비 폭등에 따른 대책 마련으로 뉴스가 시끄럽다. 오늘도 물가 그래프는 꺾임 없이 고속 행진이다. 정권 내에 결과물을 보겠다는 빤한 스토리 말고 선대와 후대가 살 수 있는 발판을 고민할 수는 없는지, 위대한 지도자의 부재를 나만 떠올리는지 궁금하다. 젊은 청년과 어린 세대가 살아갈 구멍을 만들어 줘야 하는데 하며 혀를 차는 나는 제대로 어른 노릇을 하는지 질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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