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플로 인한 타의적 자살이 끊이지 않다. SNS의 소신 발언이인해전술식 악플에 매장당하거나 온라인상의 신상 털기가 공공연하다. 다르니까 싫다는 혐오가 일상인 시대가 온 것이다. 팬데믹 이후 SNS(사회관계망 서비스)가 소통의 주류가 되면서 사람 사이의 관계망은 넓어졌지만 찌라시와 가짜 뉴스, 사생활의 노출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과잉 공급된 정보를 일일이 사실 유무와 공정성을 따질 여유가 없다. 자신을 상품화하는 일이 '능력'으로 인정받는 시대에, AI 알고리즘을 따라 선별된 창으로 세상을 보는 우리는 한쪽으로 치우치고 있음을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다.
온라인상의 관계는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가면성과 익명, 무책임과 탈퇴의 용이성 때문에 개인주의를 고집하지만 고립은 싫은 현대인의 취향에 잘 맞는다. 하지만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하는 깊은 교제의 부재를 단톡방의 알람이 대신하는 것도 잠시, 혼자 있을 때 밀려오는 공허함과 외로움은 채워지지 않는다.
온라인 영상은 빠르고 자극적이다. 임팩트가 없는 화면은 가차 없이 넘겨지며, 앞뒤 전후를 차분히 듣는 기다림은 이제 미덕이 되었다. 인터넷 속도를 따라 생활 패턴까지 빨라지면서 예민해진 감각은 다르거나 맘에 들지 않다는 이유로 떼로 몰려가 악플을 다는 집단 린치를 가하고, 죄책감은 군중심리에 편승해 쉽게 희석된다. 간단하게 자판을 두드린 말이 누군가를 저격하여 가차 없이 무너뜨리는 총구가 된다는 걸 알고 있을까. 혐오를 판 악플이 조회와 구독 수로 벌어들인 검은돈이 넘쳐나는 지금, 악플을 소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꼬리물기식 이슈를 헤드라인으로 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16세기 마녀사냥이 여전히 진행 중인 듯싶다.
온라인에서 시작해 오프라인으로 촉발된 2016년 촛불 시위는 서로 다른 프레임이 명분을 만나 시너지를 폭발한 사례다. 개인의 권리라는 게 선거철에만 써먹는 '한 표' 뿐인 줄 알았지만 평화시위의 성공은 개개인이 가진 파워가 어느 정도인지 생각하게 한다. 온라인을 게임과 채팅, 동영상 놀이터로만 알던 아날로그 세대는 가상공간이 일으킨 오프라인의 기적을 똑똑히 체험했다.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 대중음악 시장에서 최고의 영광과 인기를 차지한 BTS 에겐 글로벌 팬덤 '아미'라는 파워가 있다. 대표적인 자본주의 사업인 대중문화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팬덤으로 성공할 수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다국적 애정과 행동이 랜선으로 가능한 시대인 지금은 단 몇 분만에 세계 곳곳에 일어난 일을 생방으로 공유하며 불가능이 언제든 가능이 되는 시대다.
부스러기 정보에 홀리지 않고, 진짜와 가짜 사이를 방황하는 미디어 난민이 되지 않기 위해 죽어라 트렌드를 쫓아야 하는 걸까, 자연인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지식 영역은 인공지능의 속도와 빅데이터에 점령당했고 답을 내는 일은 기술의 역할이 되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라는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무자비한 기술 속도에 제 자리를 잃을까 두렵고 피로할 때 우리는 질문을 해야 한다. 행복을 카테고리별로 설명하고, 잘 사는 방법이라는 검색에 수백 가지의 요령을 나열하는 인공지능에 맞서는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근원적인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눈물이 나는데 기쁘고, 실패했는데 행복한 이것은 무엇인가.'
답보다 질문이 중요한 건 우리의 삶이 결론이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앎과 모름의 경계에 있는 자신을 사랑하면서 정답을 노답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AI를, 혐오를 이겨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