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을 알리는 카운트 다운이다. 중등과 고등은 없는데 유독 초등은 일일 업무를 알림장처럼 아침마다 공공 메신저로 보낸다. 여기에 어느 시점이 되면 빨간 볼드체로 카운트 다운을 알린다. 저 날을 보며 힘내라는 의미다. 방학식이 끝나면 99%가 조퇴하며 그동안 고생했으니 잘 쉬고 충전해서 30일 혹은 40일 뒤에 보자고 인사한다. 아는지 모르지만, 이런 행사는 오직 교사만 가능하다.
학교, 그들만의 리그
# 학교라고 하면 보통 학생과 교사를 떠올린다. 공무원과 교육공무직원, 용역과 계약직 강사 등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바닥 20년이지만 여전히 학교에 공무원이 있음에 놀라는 이들을 만난다.
“선생이 아니면 뭐해요?” “좋겠어요. 방학 때 놀고”
다시 말하지만 교사와 학생만 논다.
공무원으로서 연가를 10일 이상 편안하게 쓸 수 있었던 건 4년 전부터다. 그것도 반드시 일정 퍼센트를 사용하라는 강제 지침과 학교 형편이 무난했기에 가능했다. 그러니까 경력 15년이 넘어서야 눈치를 좀 덜 보며 월차 쓰는 게 가능해진 셈이다.
# 2015년에 공무원 직종 중 자살률 2위라는 오명 때문에 개최된 국회 정책토론회에 참여했다. 전국의 교육행정 공무원이 모여 소수 직종이 혈혈단신 감내한 사례를 발표하고 법제화를 위한 의견을 모았다. 신규였을 때 20년 차 선배들은 따까리 신세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그 후 20년이 지나서야 행정실장은 공식적인 직위가 되었다.
# 연초 민주적 협의라는 이름 아래 적게는 1:4 많게는 1: 30명을 상대로 업무 협의를 한다. 절대다수 대 절대 소수의 서바이벌에서 한 가닥 승률이라도 나면 그 해는 그나마 평년이다.
# 교육행정직은 회계직 공무원이다. 여전히 학생과 교사만 떠올리는 일반인은 모르겠지만 책상에 앉아 서류 몇 장 훑겠지 하면 억울하다. 별도의 수당 없이 공식 직함만 십 수개이다. 권한 없이 무한한 책임을 지닌 직함은 일이 벌어질 때 필요한 총알받이이다. 출근 때마다 다짐한다. 오늘도 무사히.
1호봉으로 시작하는 공무원과 8호봉으로 시작하는 교원은 이미 차이가 여실하다. 왜 나는 1호봉이고 그들은 8호봉인지, 나의 사회 경력은 삭제되는데 누구의 것은 인정되는지 억울했다. 비슷한 학벌과 공채를 거쳤지만 잔심부름 취급당하는 말단 9급 공무원이 담당자이자 책임을 뒤집어쓰는 관리자여야 함에 분통 터졌다. 결국 아무도 모르는 학교, 그들만의 리그에서 소수의 외침은 너무 작다.
월급 주는 대한 교육
방학이면 학교는 대부분 공사판이다. 여름방학은 공사 집중 기간, 겨울방학은 공사 겸 예결산 기간이다. 행정실과 관리자 한 명, 교육공무직원 한 명만 오롯이 학교를 지킨다. 자가 연수라는 명목으로 쉬는 방학은 여행을 가든, 책을 읽든, 공연을 관람하든 다 교육용이라서 유급이다. 연수보고서는 사라졌고, 실질 경비인 중식비, 교통비까지 지급되는 급여에 도장을 꾸욱 찍을 때마다 큰 숨을 쉰다. 해외여행 후일담을 나누는 그들과 함께 맞는 활기찬 개학 첫 회의에 맥이 빠진다. 연간 60일 이상을 근무하지 않아도 급여가 온전히 나오는 대한 교육의 현실이다.
회사에서 생존 투쟁인 이들에게 '교육 현장의 인식이 예전만 못하고 감정 노동과 학교 폭력 등 어려운 사정이 있다'고 편을 들었지만 냉대받았다.
“원래 사회라는 게 죽기 아니면 살기야. 고생했다고 쉬다간 그걸로 끝이지. 어쨌든 일 년에 두세 달 놀아도 월급 나온다며? 무슨 말을 해도 말이 안돼.”
그들을 설득할 논리가 빈약하다.
무면허 겸직 공무원
# 회계직으로 시작한 처음은 사수는커녕 동료 직원 하나 없었다. 다행히 시대가 변해 혼자 근무하는 행태는 사라졌지만 뜬금없는 전문 분야가 계속 생긴다. 사무실은 종일 전화와 키보드 소리다. 거미줄처럼 촘촘한 전산은 쉬는 타임이나 요령이 없고 여차하면 소명서 제출하라는 시스템 감옥이다. 학생, 학부모 상대 안 하고 자기 일만 하니 좋겠다고 하지만 나는 사람 전문가다.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 업체 사람인지, 일반인인지, 공무원인지, 교사인지 안다. 사람을 만나는 게 일상인 직업병이다.
달랑 교무실과 행정실뿐인 학교의 전화는 대부분 일차적으로 행정실 몫이다. 걸려오는 전화를 응대하다 오후만 되면 목이 잠기는 직원은 커피 중독이다. 처리하는 만큼 쌓이는 공문과 보고, 민원, 사업과 매일의 업무는 쳇바퀴처럼 반복이다.
"복사가 안돼요. 창틀에 먼지가 있어요. 벌레 나와요. 전화가 안돼요."
놀랍게도 교직원의 고충사항이다. 복사지를 보충하든지, 물걸레로 닦거나 벌레를 잡고 전화 코드 한번 살펴볼 일이건만 어린애 돌보는 집인지 직장인지 알 수 없는 투정에 다시 한번 이곳이 교육 현장이라는 사실때문에 기가 막히다. 조용히 제 할 일만 한다는 행정실은 코로나19에도 다중이 방문하는 외부인 밀접 접촉 구역이다.
# 가계부 써 본 적이 없는 데 예결산을 한다. 익숙해질 만하니 몇천부터 몇 억짜리 공사를 주관하며 공사 현장을 드나든다. 건물을 짓거나 철거하며 몇 천짜리 전문공사는 흔한 작업이다. 못 하나 박지 못하던 나는 그렇게 무면허 시설직이 되었다. 세상이 변하면서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근무하게 됐다. 그들의 고충처리담당자인 나는 근로기준법과 판례를 헤엄치는 무면허 노무사로 변신 중이다.
부끄러움을 고백합니다.
# 15년 차가 되면서 현실에 순응했고 울분을 다스렸으며 한쪽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그럼에도 도통 이런 카운트다운을 보면 상식 없는 직장이 창피하다. 누군가에겐 유급 방학이지만 일 년 365일을 근무하는 다른 직원에게까지 버젓이 카운트하며 우린 곧 쉰다고 공공연히 알리는 비매너에 어이없다. 유독 초등만이 이런 게 어린 학생을 상대하기 때문에 순수해서 그렇다고 해석해야 하는 건지 원.
# 아침부터 속상해하는 직원들을 다독일 방법이 없다. 판공비가 없어서 사비로 소심하게 커피를 사는 게 전부다. 나름 학벌과 스펙을 갖춘 요즘 직원들은 공무원 합격도 잠시, 폐쇄적인 학교 현장에서 겪는 박봉과 박탈감에 당혹해했다. 할 수 있다면 어디 파견이라도 가라는 말을 던지곤 불경기 시대,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에 감사할 따름이지만 여전히 직장이 부끄럽다.
#젊은 시절 끓던 피가 잠시 솟았던 금요일이다. 불금의 오후, 주차장의 반 이상은 이미 조퇴자들로 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