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 믿음대로 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나는 어떤 일을 해낼 수 없다고 계속해서 말하면 정말로 그 일을 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생긴다. 반대로 할 수 있다고 믿으면 애초에 그 일을 해낼 능력이 없었어도 결국에는 정말로 그 능력을 갖추게 된다. _ 마하트마 간디
2010년 여름 어느 날. 현실인지 꿈인지도 모를 정도로 몽롱한 상태의 나는 어렴풋이 ‘엄마가 옆에 있구나’하는 생각 외엔 아무런 사고 능력이 없었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맴맴 어지럽게 울리고, 귓가에 삐-이 거리는 이명 때문에 잠들고만 싶었다. 눈을 감고 여기가 어디든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돌아보니, 그날 엄마의 심정이 어땠을까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스물다섯, 꽃처럼 예쁜 나이.
엄마 눈에는 꽃보다 예쁘기만 했을 딸. 엄마는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해 여름이 떠오르면 눈물이 난다. 어지럽고 잠들고만 싶었던 공간이 대학병원의 로비였음을 깨닫기까지 일주일도 더 걸렸다. 희뿌옇게 남은 그날의 기억 중에 아직도 또렷이 떠오르는 단 하나는 엄마가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는 것뿐이다.
그날은 내가 신경정신과에 강제 입원을 한 날이다. 그 후로도 내가 입고 있는 옷이 환자복이라는 사실과 걱정스러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이모와 삼촌들의 방문이 병문안이라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나는 많이 아팠다. 조울증 진단을 받고 강제 입원까지 해야 할 정도로 망가진 딸. 그런 내 옆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을 엄마. 딸이 다시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빌고 또 빌었을 엄마.
그해 여름, 엄마는 내 앞에서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이십 대 중반에 찾아온 조울증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병이 아니었다. 꼬박 두 달을 입원하고 나와서도 주기적으로 외래를 다녔다. 다시 사회에 적응하는 건 더 쉽지 않았다.
사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텐데, 사람들 앞에서 약을 먹어야 하는 일이 생길까 늘 두려웠다. 간신히 취업하고도 일주일을 버티기가 힘들었다. 하루 만에 도망친 곳도 있었고 용케 두어 달을 다니고 그만둔 적도 있다.
대인기피증이 생겨 스스로 옷 한 벌 사러 가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숨이 안 쉬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면 서점으로 향했다.
서점은 참 고요하고 편안했다.
아무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그리고 난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의 책을 마구 읽었다.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찾아야만 했다. 독서를 하면 할수록 내 삶도 한 페이지씩 넘어갔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잃었던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잘 웃는 딸, 수다쟁이 친구 같은 언니로 돌아왔다.
나도 다시 남들처럼 살고 싶었다.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려웠지만, 갑자기 소식이 끊겼던 이유와 아팠던 이야기도 웃으며 해줄 수 있게 되었다. 자상하고 믿음직스러운 남자친구도 생겼다.
세상과 등진 동안 해보지 못한 것들도 하나둘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중 하나가 인스타그램이었다. 책으로 인생을 다시 찾은 나는 자연스럽게 인스타그램을 독서 기록장으로 쓰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의 나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책 읽는 엄마’, ‘인스타그래머’, ‘1인 사업가’, ‘반아미스토어 대표’, ‘인스타마켓 셀러’, ‘인스타마케팅 강사’ 등으로 활동하는 ‘마이크로 인플루언서’가 될 줄이야. 게다가 올해 만약 책이 발간되면 ‘작가’라는 아주 근사한 역할까지 더해질 것이다.
이 모든 기적의 시작은 인스타그램.
SNS(Social Networking Service) 세상속에서 ‘책’이라는 공통 관심사로 맺어진 인연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나와 같은 기적이 필요한 사람이 어딘가 있을 것 같아 글을 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