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기억이 만든 나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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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기억 속의 집
내 어린 시절, 외갓집은 한옥이었다.
삐걱대는 나무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단정하게 빗질한 흙마당이 있고,
마당 끝에는 ㄱ자 형태의 대청마루와 방, 툇마루와 부엌이 이어졌다.
봄이면 뒷산 아카시아꽃 향기가 마당 가득 퍼졌고,
여름이면 낮은 돌담을 따라 포도 넝쿨이 늘어졌다.
장독대 위의 살구나무, 수돗가에서 놀던 소꿉장난,
비 오는 날 처마 끝 빗방울을 손바닥에 담던 순간까지.
할머니가 내어주던 수박 한 소반,
빨래터 개구리 소리에 잠들던 여름밤,
겨울이면 비닐포대로 눈썰매를 타던 뒷마당.
그 모든 장면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어릴 적 내게 외갓집은 놀이이자 가족이었고,
바쁜 엄마를 대신하는 따뜻하고 안전한 울타리였다.
나는 82년생, 마흔네 살이다.
지금의 내 또래가 이런 집의 기억을 가진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일까, 나에게 이 기억은 더 특별하고, 나만의 이야기처럼 남아 있다.
우리집 놀이터
그래서일까.
나는 지금 아파트에 살면서도 그 기억을 닮은 공간들을 만들었다.
마당이 없는 집이지만, 거실에 ㄱ자 형태의 평상이 소파를 대신한다.
아이들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다 같이 누워 뒹굴거리기도 한다.
때로는 아이들의 작은 무대가 되어, 여러 가지 공연이 펼쳐지기도 하는 우리 집의 놀이터다.
아이들의 비밀 아지트
아이들 방은 문 대신 두 개의 창을 만들었다.
하나는 작은 창 같은 문,
또 하나는 큰 창 같은 문.
큰 창의 턱에 앉아
주방에 있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작은 창으로는 얼굴만 빼꼼 내밀어
숨박꼭질을 하기도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계단이 이어지고,
그 끝에는 다락이 나온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이 작은 공간안에서 아이들의 이야기가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되기를 바란다
그곳은 아이들에게만 허락된
작은 비밀 아지트다.
주방 옆의 작은 광
외갓집 안채에 붙어 있던 작은 광.
오래된 살림살이가 차곡차곡 쌓여 있던 그곳은
나에게 늘 비밀스러운 공간처럼 느껴졌다.
반면, 아파트 구조는 어느 집이나 똑같다.
같은 평면, 같은 배치.
들어가 보지 않아도 무엇이 어디에 있을지 다 알 수 있다.
나는 그런 집이 싫었다.
아이들이 숨을 수 있고, 이야기가 숨어 있는 집.
열면 또 다른 세계가 나오는,
작고 특별한 공간이 있는 집을 만들고 싶었다.
설계자로서의 깨달음
그래서 나는 집을 설계할 때 클라이언트에게 묻는다.
집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들을 말이다.
그 사적인 기억이 공간에 녹아들어야
그 집은 특별해지고,
그 사람의 삶을 닮을 수 있다.
나 역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지금의 집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집은,
아이들의 기억 속에 또 다른 특별한 집으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집이
삶의 쉼이 될 수 있다고.
다음 글에서는,
실제 프로젝트 속에서 각 집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그 사적인 이야기들이 어떻게 공간의 형태와 구조로 이어졌는지,
‘살아있는 디자인’의 기록으로 함께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