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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세연 Sep 10. 2018

비종교인 4인이 읽은 단테의 신곡

다들 말하지만 사실 읽은 사람은 소수인 신곡에 대하여

- 일시 : 18/9/ 8 토, 주말 치고 이른 아침 10시
- 참석자 : 비종교인 4인(1명은 반 정도는 종교인)
- 주제 / 책 제목 : 종교 / 단테의 신곡

저번 모임을 여행 때문에 빠졌더니 내가 없는 사이 과연 무시무시한 책이 선정되었다. 모임 초창기부터 나는 ‘(재밌는 책만) 애독’ 할 뿐, 절대 ‘(모든 책을) 다독’하는 사람이 아니다, 박애주의는 개뿔, 내가 좋아하는 책만 읽기에도 인생이 짧다, 라는 소신을 분명히 밝혔건만, 언제나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위대한 우리 멤버들 덕에 나의 소신에 처절히 반하는 책을 읽어야만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이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일단 책을 ‘원문’으로 읽는 건 일찌감치 포기하기로 했다. 다행히 나와 비슷한 위기를 겪고 있던 한 멤버가 친히 ‘소설로 풀은 신곡’을 추천해 주어 ‘황금부엉이 출판사에서 나온 단테의 신곡'을 읽기로 결정했다.

분홍색이지만 사실 저건 끔찍한 그림입니다

출근길에 신곡을 읽으며, 아이러니한 기분에 휩싸일 때가 많았다. 전날 늦게까지 야근해 축축 쳐지는 몸으로, 그러고도 못 끝낸 일 때문에 찝찝한 기분으로, 3호선 통근 열차에 끼어 꼬박 60분을 서서 단테가 그리는 지옥을 바라보자니, 이거 이거 지금 여기도 꽤나 유사한 모습 아닐까, 내가 굳이 1300년대의 지옥을 볼 필요가 있나! 하는 절규를 마음속으로 외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래도 이 책에 한해서는 읽는 시간대를 다르게 설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고민하게 되더라.

 

어찌 되었든 모임에 대한 애정과, 책에 대해서 가끔 발현되는 성실함으로 ‘신곡'을 분량까지 다 읽었고 모임 날이 밝았다. 책도 책이었고, 이번 모임은 또 유난히 빠른 시간에 잡혀 출발하는 그 순간까지 ‘아 가지 말까’를 고민했지만 결국 모임에 향했다. 그리고 마이너스를 치닫는 기대와는 다르게 모임은 아주 즐거웠다.



비종교인 4인이 바라보는 단테의 신곡

공교롭게도 이번 모임에 참여한 4인은 모두 비종교인이었다. (1명은 반만 신자) 종교에 대해 논하는 책을 비종교인들이 이야기한다는 게 모순적이기도 했지만, 외려 선입견도, 지식도 없는 백지에서 더 다양한 생각이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토의를 시작해보기로 했다.


신곡이 묘사하는 지옥은 왜 이렇게 끔찍할까?

신곡의 지옥은 잔혹하다. 이교도들은 산채로 묘에 묻혀 영원히 불태워지고, 위선자들은 납으로 된 옷을 입고 한 평생을 짓눌린 채로 움직이지 못한다. 이 외에도 다양한 죄목에 의해 죄인들은 몸이 찢기고, 작살에 꿰뚫리고, 부러진다. 온갖 폭력적이고 자극적 이미지가 넘쳐나는 현대인의 눈에는 고작 활자로 구현된 단테의 지옥이 시시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책을 읽는 초반 내가 그랬다) 당대의 사람들에게 이는 실로 엄청난 상상력이자 공포스러운 사후 세계의 탄생이었을 것이다. ‘나쁜 일을 하면 지옥에 간단다’라는 막연한 가르침이, ‘폭력을 저지르면 진흙뻘에 묻혀 200년을 숨도 못 쉬고 꼬르륵 댄단다’로 구체화된다면 당연하게도 공포는 배가 되지 않을까.

 

과거 종교는 무지한 대중을 계몽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도구의 역할을 했고, 이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때 단테는 뛰어난 상상력과 고대 그리스 신화와 성경을 넘나드는 풍부한 지식을 밑천으로 아무도 볼 수 없는 사후세계를 생생하게 현실화시켰고 그리하여 이 시는 당대를 넘어 지금까지 불멸의 고전이 된 것이다. 책을 처음 폈을 때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말만 쓰면 다 고전이 되나?라는 시니컬한 태도로 ‘신곡'을 흘겨봤는데, 시대적 맥락을 가지고 바라보니 그 위대함이 납득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신곡에서 단테는 울부짖는다. ‘왜 저 죄인들은 저렇게 고통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왜 이렇게 끔찍한 일을 의도하셨나’ 단테의 물음과 같이 종교인들은 모든 일은 하나님이 계획한 대로 흘러간다고 말한다. 본인은 그저 하나님의 장기 말일뿐, 세상은 더 커다란 신의 의도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불경스러울지 모르지만, 나는 이에 대해 종종 의문을 갖곤 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나는 왜 노력해야 하는가?’ 이런 우문을 모임에 공유하자 뜻밖의 현답이 돌아왔다. 짧은 에피소드를 먼저 소개한다.


 양쪽 다 신자인 남녀가 다툰 상황, 남자가 말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오늘 이 순간 다투게 하셨을까? 이건 어떤 의미일까, 함께 생각해보자.’


이 에피소드를 들은 모임의 3명의 비종교인은 탄식했다. ‘뭐라고? 네가 잘못해서, 네 결함 때문에 싸운 걸 왜 하나님 탓을 하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1명의 (그다지 성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신자가 그 의문에 답해주었다.

이 말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게’ 아니다. 이러한 의문을 시작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겠다는 뜻이다. 나의 이해심이 부족하고, 나의 배려가 부족하다는 것을 하나님이 이 기회에 알게 해주시려고 싸움이라는 고난을 주셨다, 그러니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더 좋은 내가 될 기회로 삼는 게' 신자의 태도라는 것이다.

그 설명을 듣고 느끼는 바가 컸다. 비종교인의 시각에서 종교를 너무 비판적으로 재단했구나, 하나님이 뜻하는 바로 일이 행해진다 라는 것은 '일의 현상에 치우치지 않고, 그 속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노력하고, 나를 개선하려고 노력하면 결국 더 나은 방향으로 일이 흘러간다.'라는 뜻일 수 있구나 를 깨달았다. 몇 해간 궁금했던 의문이 풀리며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에 다리가 놓이는 순간이었다.


“내 손으로 바꿀 힘”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위와  같은 건설적 마음으로 신을 찾을까? 우리는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때 기도를 한다. 여기서 경계해야 할 것은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때 ‘기도만’ 하는 것이다. 신이 있다면  인간이 바라는 이기적인 소망들을 다만 ‘열정적으로’ 빈다고 해서  들어줄  턱이 없다. 인간은 인간의 영역에서 노력하고 신에게는 약간의 행운을 구하는 것, 그게  올바른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기도가 ‘내 손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는 자들의 허무한 메아리'가 되지 않기 위하여 짚어야 할  점이다.


비종교인들끼리 논한 단테의 신곡은 결국 ‘신과 올바른 믿음’에 대한 이야기로  끝이 났다. 고전이라서 덜컥 겁부터 집어먹었는데 역시 그럴 필요가 없었다. 독서모임의 장점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던 책 선정이었다. 혼자라면 절대로 읽지 않았을 책을 통해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었던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다음 모임은 신곡 2탄(연옥과 천국)에 대해서다. 기독교학과 멤버가 참여할 예정인데 보다 종교학적 관점에서 신곡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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