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함과 경박함 사이, 말의 무게

by 바나나 슈즈
ChatGPT Image May 14, 2025, 03_57_56 PM.png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우리는 무엇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가? 겉모습, 행동,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말'이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인격과 교양, 생각의 깊이를 가늠한다. 말에는 무게가 있다. 어떤 이의 말은 마치 납덩이처럼 묵직하고, 어떤 이의 말은 깃털처럼 가벼워 기억조차 남지 않는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이야기했다. 넓고 커서 천지에 가득 찬 기운, 의로움을 쌓아 길러낸 정신이다. 그는 이런 기상을 지닌 사람의 말에는 자연스럽게 무게가 실린다고 보았다. "말이 진중한 사람은 그 마음도 진중하니, 천지와 함께 할 수 있도다." 말의 무게는 그 사람의 내면의 깊이와 비례한다는 통찰이다.

1643년 병자호란 직후, 조선의 학자 장현광(張顯光)이 제자들과 나눈 대화가 전해진다.


한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어찌하면 말에 무게를 실을 수 있겠습니까?"


장현광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평소에 말을 아끼는 자는, 말할 때 귀한 옥을 꺼내듯 하느니라. 그러나 평소에 말을 함부로 하는 자는, 말할 때 흔한 돌멩이를 던지듯 하느니라."


북송의 학자 정호(程顥)는 '암달지언(暗達之言)'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해 보이나 깊이 들여다보면 심오한 진리를 담은 말이다. 그는 "참된 말은 처음 들을 땐 단순하나, 곰곰이 생각할수록 깊어진다"고 했다. 진중한 말은 즉각적인 감탄보다 오래 남는 여운을 준다.


말의 무게는 그 사람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삶의 자세에서 나온다. 조선의 명장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이런 구절을 남겼다. "말을 하기 전에는 내가 말의 주인이나, 말을 한 후에는 말이 내 주인이 된다." 신중하게 선택한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는 동시에 운명을 좌우한다는 통찰이다.


퇴계 이황은 '천인성명론(天人性命論)'에서 인간의 말과 천리(天理)의 관계를 논했다. "진실된 말은 천리와 통하고, 허위의 말은 천리와 어긋난다." 진중한 말은 단순히 무거운 것이 아니라 우주의 이치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깊은 통찰이다.


말의 진중함과 경박함은 일상에서 쉽게 구분된다. 경박한 말은 주로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내뱉는다. 둘째, 책임감 없이 약속한다. 셋째, 상황과 상관없이 자신을 과시한다. 반면 진중한 말은 깊은 사고의 결과물이고, 책임감이 담보되며, 상황에 적절하다.


『동국병감(東國兵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장수의 입에서 나온 약속은 금석(金石)과 같이 견고해야 한다." 전쟁에서 장수의 말 한마디는 수천 명의 목숨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책임감 있는 약속은 신뢰를 쌓고, 가벼운 약속은 신뢰를 무너뜨린다.


한편 진중함이 반드시 말수가 적은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조선의 학자 유성룡은 "침묵이 항상 지혜로운 것은 아니며, 말함이 항상 어리석은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말의 양보다 질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충분히 생각하며, 책임감 있게 말하는 것이 진중함의 핵심이다.


현대 사회는 말의 경박함을 조장한다. SNS에서는 깊은 생각 없이 즉각적인 반응을 내놓는 것이 일상화되었고, 단편적이고 자극적인 표현이 주목받는다. 그러나 이런 환경일수록 말의 진중함은 더욱 가치 있게 빛난다.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표현하는 사람의 말은 소음 속의 명상곡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준다.


결국 말의 진중함은 그 사람의 인격을 반영한다. 공자가 말했듯 "군자는 말을 신중히 하고 행동을 민첩히 한다(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말이 진중한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가다듬고 수양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말에는 자연스럽게 무게가 실린다. 그 무게는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깊이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운명을 바꾸는 한 마디, 말의 선택과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