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풍이 절정에 이른 어느 날, 향산(香山) 최치원을 찾아온 젊은 선비가 있었다. 그는 최치원의 명성을 듣고 글쓰기의 비결을 배우고자 왔다. 최치원은 그를 정원으로 데려가 물었다.
"저기 보이는 대나무를 보게. 왜 저리 곧고 단단하다고 생각하나?"
젊은 선비가 대답했다. "비와 바람을 견디며 자라서 그렇습니다."
최치원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대나무는 속이 비어 있기에 곧고 단단하네. 말도 마찬가지라네. 비워야 깊어지고, 절제해야 단단해지지."
이 일화는 최치원의 언어관을 잘 보여준다. 그는 신라의 대학자였지만, 자신의 문장에 관한 한 끝없는 절제와 다듬기를 멈추지 않았다. "한 문장을 쓰기 전에 천 번 생각하라"는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논어』에는 '거자사언(居子思言)'이라는 표현이 있다. 공자의 제자 자사(子思)처럼 생각하고 말하라는 뜻이다. 자사는 말을 할 때마다 신중했으며, 불필요한 말을 삼갔다고 전해진다. 공자는 이를 두고 "말을 아끼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라고 칭찬했다.
언어의 절제는 단순히 말을 줄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효과적인 소통을 위한 전략이다. 오자병법(吳子兵法)에는 '부동불언(不動不言)'이라는 구절이 있다. 움직이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전쟁에서 확실하지 않은 정보로 군사를 움직이지 않듯, 확신이 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가르침이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 정철(鄭澈)은 말수가 적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문학 작품들은 오늘날까지 감동을 준다. 한 번은 선조가 정철에게 왜 조정에서 말이 적은지 물었다. 그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말은 샘물과 같습니다. 깊은 샘은 소리 없이 흐르고, 얕은 샘은 요란하게 흐릅니다."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王守仁)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했다. 앎과 실천은 하나라는 뜻이다. 그는 "말이 많으면 행동이 적어진다"고 경고했다. 말을 절제하는 것은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진정한 앎은 말이 아닌 실천으로 증명된다는 통찰이다.
말의 절제는 자기 통제력의 표현이기도 하다. 송나라 학자 주희(朱熹)는 "분노할 때 침묵하라"고 가르쳤다. 감정에 휩싸여 내뱉은 말은 종종 후회로 이어진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필요할 때만 말하는 능력은 고도의 자기 수양을 보여준다.
그러나 말의 절제가 소통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소통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이렇게 말했다. "천 마디 말보다 한 번의 깊은 대화가 낫고, 천 번의 대화보다 한 번의 진심 어린 공감이 낫다." 말을 아껴 쓰는 사람의 한마디는 그만큼 무게가 있다.
조선의 성리학자 이이(李珥)는 "말은 수레와 같아서, 적재량을 넘으면 바퀴가 부러진다"고 했다. 필요 이상의 말은 오히려 의미를 퇴색시키고 신뢰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말의 절제는 자신의 생각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지혜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는 소통과 표현을 요구한다. SNS는 우리에게 모든 생각과 감정을 즉시 공유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이런 환경일수록 언어의 절제는 더 큰 가치를 지닌다. 모든 것을 즉각 말하는 세상에서, 생각하고 절제하는 것은 강한 자기 확신과 인격의 성숙함을 보여준다.
미국의 언어학자 드보라 태넌은 "침묵은 공백이 아니라 의미로 가득 찬 공간"이라고 말했다. 언어의 절제는 단순히 말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더 풍요로운 의미의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말을 절제하는 사람의 특징은 '경청'에 있다. 자신의 말보다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말을 아끼게 된다. 탈무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신이 인간에게 귀를 두 개 주시고 입은 하나만 주신 것은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로 하라는 뜻이다."
결국 언어의 절제는 자신의 내면을 풍요롭게 가꾸는 과정이다. 신라의 원효대사는 "말을 줄이면 마음이 깊어지고, 마음이 깊어지면 지혜가 열린다"고 했다. 말을 아끼는 지혜는 그저 처세술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가꾸고 타인과 더 깊이 소통하기 위한 길이다. 그 길에서 우리는 진정한 언어의 성숙과 삶의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