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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재 Feb 06. 2020

딱 한 발만 걸어보자

책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고

배우 하정우.


여러분이 가장 먼저 떠올린 그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누군가는 '추격자' 속 연쇄살인범을, 누군가는 '신과 함께'의 강림을 떠올렸을 것이다. '황해' 속 먹방 장면은 또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렇다. 그는 영화 배우다. 많은 경우, 그는 영화 속 배역이나 장면으로 기억된다. 배우가 아닌 보통 사람으로서 하정우는 대중에게 익숙지 않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걷는 사람, 하정우>는 배우 하정우의 에세이집이다. 책의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책에는 내가 배우로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내 두 다리로 걸어 다닌 길, 그리고 걸으면서 느낀 내 몸과 마음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서문 '웬만하면 걸어다니는 배우 하정우입니다' 중에서


유명 배우라면 매니저의 차량으로 이동할 것 같은데, 웬만하면 걸어다닌단다. 저 멀리 있는 '배우 하정우'가 '사람 하정우'로 바뀌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책 <걷는 사람, 하정우>는 보통사람 하정우를 알 수 있는 책이다. 그의 생각과 삶의 철학이 책 속에 녹아있다. 그의 살가움과 인간다움이 묻어난다.


에세이를 묶은 책이니 만큼 길지 않은 글이 이어진다. 그래서 쉽게 금방 읽힌다. (최근 내 생각과 많이 닿아있어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위안을 받기도 했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기도 했다. 걷기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독자로서 내가 이 책으로 배운 것은, 사실 걷기뿐이 아니었다.




작은 것들의 힘

말의 힘. 관계의 힘. 시작의 힘. 습관과 루틴의 힘. 그리고 걷기의 힘까지. 그는 작은 것들의 힘을 강조한다. 일상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길 좋아하는 내게, 이 책의 가장 좋았던 부분이다.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말로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위의 책 '언령을 믿으십니까' 중에서


지나온 나의 필모그래피와 작업들을 돌아보면 내가 지금 여기까지 무사히 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고 또 한편으로는 두렵다. 삶의 행로 곳곳에 숨겨진 지뢰밭들을 나는 어떻게 피해올 수 있었던 것일까. (…) 나 혼자는 아니었기에. 내 인생이라는 코트에서 나는 언제나 동료들의 어시스트와 협력으로 인해 비로소 빛날 수 있었던 선수였다. -위의 책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중에서


일단 몸을 일으키는 것. (…) 이러한 행동의 습관이 되면 그다음부터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일어나 걸을 수 있다. 몸에 익은 습관은 불필요한 생각의 단계를 줄여준다. -위의 책 '한 발만 떼면 걸어진다' 중에서


이외에도, 책의 전반에서 반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루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의 루틴은? 아침 기상과 동시에 러닝머신 걷기, 아침식사 반드시 챙겨 먹기, 걸어서 출근하기다!) 그리고 많은 배우와 작가들이 정직한, 일정한 생활 리듬을 갖고 있다고. 그들이 일탈보다는 직장인이나 운동선수와 같은 일과를 보낸다고 말하고 있다.



그도 불안한 시절이 있었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의 '결과'만 보고 '과정'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한다. 막연히 부러워한다. 막상 그 과정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가 보이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거나, 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위안을 받거나.


돌아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걷기밖에 없는 것만 같았던 시절도 있었다. 연기를 보여줄 사람도, 내가 오를 무대 한 뼘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 안에 갇혀 세상을 원망하고 기회를 탓하긴 싫었다. -위의 책에서


성공한 배우도 불안한 시절이 있었단 것.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다는 것. 지금 느끼는 불안함은 오히려 가능성이라는 것. 나는 다행히 위의 대목에서 위안과 공감을 얻었다.



배우로 살아가는 것

주변에 배우가 없기에 배우가 무엇인지 몰랐다. 배우가 '연기하는 사람'이라는 것 외에 평소 일상이 어떤지 몰랐다. 이제는 조금 안다. 그들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배우도 사람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평소엔 잊는다. 미디어 속 배우와 연예인들을 너무 특별하게만 바라보기 때문일까.


배우로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역동적이지 않았다. 작품이 없을 땐 자유로운 편이지만, 작품이 시작되면 몇 달간 비슷한 촬영 현장에서 비슷한 사람들을 만난다. 일이 끝나면 먹고 쉬고 웃는다. 배우라는 직업이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배우라는 직업을 조금은 알게 됐다. 배우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여러모로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하정우는 영화와 관련한 에피소드를 풀어놓기도 한다. 영화 '신과 함께'에서 망자(亡者)는 저승의 일곱 개 지옥에서 재판을 받는다. 이 중 살인 지옥은 타인을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를 심판하는 곳인데,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그러니까 인터넷 댓글 같은 거 함부로 달면 안 돼! 기록 다 남아!"


재밌는 건 이 부분이 하정우가 감독에게 제안한 장면이란 것이다. 우리가 내뱉는 말의 힘에 대해 그의 생각이 영화에 반영된 것이다. 영화가 알려주지 않는 이야기를 배우이자 작가로서 말하고 있다.




책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걷기'라는 매우 단순하고 태초의 본능과 같은 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과, 배우라는 직업과, 주변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게 새로웠다. 책을 읽다가 밖에 나가 걷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실제로 밖으로 나가 걸었다!) 이 책은 독자에게 딱 한 발만 걸어보라고 권하고 있다.


걷기, 하정우와 관련해 인터넷 자료를 찾아보았다. 인터넷 상에 '하정우의 영업(?) 때문에 핏빗(fitbit)을 구매했다'는 글들이 꽤 있었다. 실제로 그는 책에서 핏빗을 자주 언급한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나는 걸음수를 측정하는 피트니스밴드 '핏빗(fitbit)'을 손목에 차고, 시간이 가듯 나의 걸음이 마일리지로 차곡차곡 쌓이는 것을 내 인생 최고의 흥미진진한 게임으로 여기며 걷는다. -위의 책에서


그는 책에서 핏빗 회사와 아무 연관이 없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그가 핏빗을 홍보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 건 사실이다. (물론 '걷는 사람'으로서의 후기지만 말이다.) 덕분에 나도 핏빗을 사용 중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문구를 꼽으라면 다음과 같다.


내 보폭을 알고 무리하지 않는 것. 내 숨으로 걷는 것.
걷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묘하게도 인생과 이토록 닮았다.


쉽지 않지만 내 보폭을 알고 무리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 냄새가 나는 책. 한 사람의 내면을 보여주는 책. 우리가 알지 못하는 걷기를 보여주는 책. 가볍게 읽히지만 메시지가 가볍지만은 않은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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