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계약이 완전히 끝났다. 드디어 내게도 작업실이 생긴 것이다. 방 3개에 거실, 화장실 하나, 베란다까지. 혼자서 사는 내가 살기엔 과분할 정도로 감사한 집이다. 전세금을 마지막으로 입금하고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공간을 구상하는 일이었다. 요즘은 나의 공간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곤 한다. 집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내 개인적인 삶과 일의 경계가 많이 옅어졌다. 너도나도 전셋집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대 전세난의 시대. 운이 좋게도 넓은 집을 구해 벌써부터 들떠있다. 10월부터 손품, 발품 가리지 않고 집을 찾았기 때문에 오래 끙끙 앓던, 묵은 업무가 해결된 듯 속이 후련하다.
음, 일단 원형 탁자를 사야겠다. 역시 집에는 유-튜바 갬성이 있어야지. 작업실이 생기면 글도 더 자주 쓰고, 그동안 손 놓고 있던 그림도 다시 그려야지. 침실에는 내가 좋아하는 빈티지 느낌이 나는 카펫도 깔고, 기르고 싶었던 식물도 기를 거야. (물론 난 식물 살인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잔 꽃무늬 모양의 침구도 있으면 좋겠어. 오래된 집이니까 그만큼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지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깔끔하게 해 놓고 살아야지라는 생각도 해본다.
살다 보니 내게 공간이 중요했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내게 공간이 주는 의미는 크다. 나는 28살이 되기 전까지 나만의 방이 없었고, 내가 나만의 공간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어릴 땐 어른이 되기만 하면 나만의 공간이 짠-하고 주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큰 착각이었다. 아빠가 돌아오는 저녁이면 훌쩍이며 집을 나가야 했기 때문에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서러워 울면서도 '더러워서라도 나중엔 꼭 내 집을 가져야겠다.'라는 생각을 무던히 했었다. 집을 나가야만 했던 이유는 동생과 싸운다는 것 때문이었는데 그 당시엔 그 이유가 뭐가 되었든 아빠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빠 역시 자신의 공간을 지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서른이 넘은 지금에서야 해본다.
공간은 정신을 반영한다.
내가 히키코모리였을 무렵, 주변은 눈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였다. 늘 어지럽혀진 방 안과 늘어진 옷가지들, 내 손이 닿는 위치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책 몇 권. 방은 나와 한 몸이었다. 직장인이었을 땐 회사 책상은 깔끔했지만 집은 늘 더러웠고, 내가 집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설거지 거리가 늘 쌓여있었다. 얼마 전 친구가 말했다. 방을 치우지 않는 건, (정확히는 치우지 못하는 건) 우울증 초기일 수도 있다고. 본인도 이별을 겪고 난 뒤 깨달았다고 한다. 문득 집 안을 보니 그 당시 자신의 모습이 집과 닮아 있었다고. '내가 사는 곳'과 '우울증'을 연관시키다니. 난 여태껏 내가 참 많이 게으른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과거에 썼던 단편 소설이 생각난다. 쓰레기를 모으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 온 집 안 전체가 쓰레기로 가득해, 마치 '쓰레기 산'처럼 보이는 그런 공간. 할머니는 무슨 대단한 추억이라고 쓰레기를 버리지 못하고 불타는 집에서도 다른 것들을 다 버리고 쓰레기만 가지고 나온다. 이웃들은 그런 할머니를 미친 사람을 바라보듯 혀를 찬다. 소설은 끝내 그 물건이 무엇인지 정확한 설명 없이 끝나는데 맨 처음 소설을 구상할 때 생각했던 그 공간에 대한 기억만은 선명하다.
남들의 공간이 이렇다, 저렇다 욕할 수 없다. 내가 대신 그 공간이 되어줄 수도 없다. 분명한 건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공간이 있고, 그것이 삶에서 꽤나, 아니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내게 지금 주어진 전셋집.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을 그 공간에서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나름의 기대를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