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사는 나, 당신에게

by 반디

알약의 개수가 점차 늘어나더니 급기야 손에 한 줌이다. 손안의 무지개처럼 색깔도 다양하다. 빨갛고, 하얗고, 파랗고...

젊은 시절에는 자연 치유를 굳게 믿으며 병원에 가거나 약에 의존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세월 앞에 그 믿음도 무색해질 만큼 요즘은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최대한 빨리 병원에 가 보곤 한다. 어차피 병원에 가게 될 것을 고통까지 억지로 감내하며 괜한 고생만 숱하게 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이제야 생각해 보니 젊은 시절 좋지 않았던 부위가 깨끗하게 나았던 것이 아니라 실은 지층같이 알게 모르게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이 되면 말 그대로 한순간에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하는 요즘이다. 오감이, 오장육부가 모두 천천히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오감이야 불편함이 따르니 직관적으로 바로 알아차리기라도 하는데 오장육부는 견뎌온 세월에 대한 인내심이 한계치에 달하면 갑자기 폭발하니 문제다. 뒤늦게 어르고 달래 봐야 진작에 관심을 두지 못한 나를 탓할 뿐이다.

나와 한 몸이나 가장 가벼이 여기고, 무례하고, 함부로 대했던 것은 아닌지 뒤돌아보게 된다. 가벼이 여긴 만큼 고통의 무게는 무거워지고, 무례했던 만큼 자비가 없으며, 함부로 대했던 만큼 철저히 외면받고 있다. 가장 귀한 것을 알아보지 못한 대가를 이제야 치르고 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 질병이야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겠지만 아직도 이 불편한 삐걱거림이 낯설기만 하다.

이미 백세를 훌쩍 넘기신 큰어머니는 아직도 정정하시다.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한시도 그 자리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늘 홍길동처럼 다니시며 움직임을 멈추지 않으시는 분이다. 본인이 하시고 싶은 말씀은 그다지 가리시지 않고 하신다. 건강 음식을 딱히 가려 드시지도 않는다. 처음 만나시는 분들이 계시면 민망하셔서 나이를 한참 낮추어 말씀하신단다. 그런 큰어머니도 아픔이 있으셨다. 작년 한 해만 두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셨다. 때로는 진시황처럼 영원불멸을 꿈꾸다가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계속 지켜보아야 한다면 그 심정이 어떨까 싶기도 하다.

골골거리면서도 소탈하지만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나와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죽음을 앞둔 나를 가끔씩 떠올려 본다. 어릴 적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된 죽음에 대한 물음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다만 멀어져 있던 죽음이 세월의 급물살을 타고 이제는 성큼 앞으로 다가온 느낌이다. 생소함과 친숙함이 함께하는 것만큼이나 아직도 어색한 단어다.

훈풍이 분다. 모란은 이미 꽃을 피웠고, 곧 벚꽃이 핀다.

나약해지는 육체에 마음도 자꾸 서글퍼지려 하지만 언제나처럼 현재를 살 것이고, 또 다른 현재를 살아갈 것이다. 지금,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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