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예찬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직장인들이 고통스러운 순간마다 주문처럼 외는 명언이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부적처럼 사표를 가슴속에 품고 산다. 그러나 마음처럼 쉽게 꺼내 들지 못한다. 직장 동료들과 하는 우스개 소리로 '생계형'이기 때문이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당장 먹고살 일도 걱정이다. 변변한 재주 하나 없는 사람들은 특히 그렇다.
참아내고 인내해야 하는 것이 모든 직장인들의 숙명이다. '또라이 불변의 법칙'이라고 아무리 만족스러운 직장이라도 꼴사나운 사람은 대개 꼭 한 명씩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찾아도 그런 사람이 없다면 본인이라고 하지 않던가. 혹시 내가 아닌지 주변을 한번 살펴보자.
청년 취업난과 고학력 사회, 저출산 등으로 인해 입직 연령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듯하다. 청년의 기준도 만 34세 이하로 기성세대들이 들으면 납득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나마 취업에 성공하면 다행이고 이 조차도 자의든 타의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좁은 땅에 능력자들은 많아 박 터지는 싸움을 뚫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오매불망 취업만 되면 북한이라도 다녀올 기세로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시쳇말로 번듯한 직장을 가질 수 있다.
취업만 성공하면 모든 일이 순탄하게 흘러갈 줄 알았는데 진정한 인생의 쓴 맛은 이제부터다. 신입이 왜 신입이겠는가.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 틈에서 졸지 않고 당차게 대응하려 하지만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려도 이론과 실전은 다를 수밖에 없다.
보통 몇 번의 실수는 신입이라는 완장이 있어 애교로 넘어가 주지만 같은 실수가 반복되면 그때부터는 능력 없는 사람으로 찍히고 만다. 각자의 영역이 있는 만큼 주변 사람들에게 묻는 것도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다. 살아남으려면, 인정받으려면 실수를 줄이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한 발 앞서 눈치껏 움직여야 한다. 언제쯤 옆의 선배들처럼 베테랑이 될 수 있을지 까마득하고 부럽기만 하다.
어디 이뿐인가. 낯선 이들과 맺는 인간관계도 어떤 때는 어느 드라마의 여주인공 말처럼 노동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몸에 배지 않은 예의와 격식도 차려야 하고, 편하게 문자로 주고받는 대신 걸려온 전화는 무조건 말로 받아쳐내야 한다. 공감하지 못하는 말들도 추임새를 넣어가며 맞장구 쳐줘야 한다. 아직 안면도 트지 않은 사람들의 경조사를 챙겨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보내는 달콤한 휴식 시간의 분, 초도 아까워 몸부림쳐보지만 어느새 소파와 한 몸이 되어 곯아떨어져 있는 나를 발견한다. 새벽에 문득 잠이 깨면 아직 출근시간까지 몇 시간을 더 잘 수 있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일상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멈춰있을 것만 같던 세월은 어느덧 흘러 그렇게 부러워했던 직장 선배의 입장이 되고 보니, 오랜 직장 생활 중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일이 아닌 남들이 쏟아내는 말들이었던 것 같다. 내 마음속 또라이들이 쏟아내는 여과 없는 말들을 감정쓰레기통처럼 받아내고, 그대로 받아치고 싶어도 서로 간의 입장과 위치가 다르니 그럴만한 용기도 없는 것을 똑같은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자기 위안을 삼기도 한다. 그나마 마음의 여유가 있는 날이면 역지사지의 입장으로 미친놈이 아닌 정상인으로 상대방을 최대한 이해해 보려 하기도 한다. 나 역시 누군가의 또라이였겠지만 말이란 정말이지 칼보다 더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런데 참 얄궂게도 이런 힘든 직장 생활을 견디게 하는 것 또한 직장 동료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다. 누구나 과거의 자신이 그 속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선배들이 건네는 말 한마디의 무게는 견뎌온 세월만큼이나 묵직하다. 퇴근 후에 마시는 차 한잔, 술 한잔이 달콤한 이유도 오고 가는 말속에서 잠시나마 위로받을 수 있기 때문일 게다.
존경하는 직장 선배의 정년 퇴임식, 회고사의 말이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어딘가에서 보니 죽을 때 가장 후회되는 것 중 3가지가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많이 하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삼십몇 년을 이렇게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선후배님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동안 많이 하지 못했던 3가지 말들을 늦었지만 한 번에 하고자 합니다.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떠나는 자와 남은 자, 나 역시 언젠가는 온갖 희로애락으로 얼룩진 이곳을 떠나겠지만 현재는 남은 자이다. 살아남은 자. 먼 훗날, 떠나는 자가 되었을 때 같은 공간에서 또 치열하게 살아가야 할 남은 자들에게 나는 또 어떤 말들을 남길 수 있을까. 적어도 다행히 나에게는 시간이 남아 있으니 선배가 못다한 말들에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해야겠고,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어 마음과 다르게 쏟아내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야 겠다.
모든 직장인들이여! 떠나는 그 날을 위해 돌격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