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
평소 과묵한 옆자리 직장 선배가 편한 친목 모임에서 찬조금을 건네며 우스개 소리로 하신 말이다. 이제는 웬만한 모임에서도 나이가 위로 많은 축에 속하다 보니 평소에는 흘려들을 말들도 뜨끔할 때가 있다. 그날도 속으로는 '그렇지... '하면서도 분위기 띄운답시고 의미 없는 말들을 너무 많이 쏟아 냈다.
대학교 1학년 때, 수업까지 빼먹으며 법정스님 강연을 들으러 간 적이 있었다. 범생이과라 수업만큼은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무엇 때문인지 스님 강연을 꼭 들으러 가고 싶었다. 불교계에서는 연예인급으로 자주 뵐 수 있는 분도 아니고 더욱이 지도 끝단에 위치한 지방에서 뵐 수 있는 날이 얼마나 있겠는가. 이번 기회를 날리면 두고 후회할 것만 같아 한 번의 망설임도 없었다.
당시는 법정스님의 '무소유' 글귀 하나하나에 흠뻑 빠져 문고판을 마치 경전처럼 들고 다닐 때였다. 첫째 언니가 생일날 고등학교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책이었는데 두께가 얼마 안 되는 문고판이라 가볍게 읽기 시작했다가 책이 너덜거릴 때까지 빛바랜 책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를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시가 아닌 수필이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마치 깨우침을 주는 설법 같은 스님의 일화는 원효의 해골물 사건만큼이나 나를 각성하게 했다. 수십 번을 읽어도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스펀지가 다색의 물을 빨아들이는 느낌이었다. 이후로 여태 어떤 책도 그처럼 강렬한 느낌과 사고를 비툴어 준 책은 없었다.
그 와중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실외 벤치에서 자판기 커피를 한잔하고 한참을 다시 공부하다 보니 불현듯 지갑을 벤치에 두고 온 기억이 났다. 아뿔싸! 역시나 지갑은 온데간데없었다. 평소라면 속상한 마음에 진땀 꽤나 빼면서 지갑을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녔겠지만 웬일인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마음이 홀가분했다. 물론 지갑이 얇아서이기도 했지만 이제 떠날 인연이 되어 떠났겠거니 생각했다.
버스가 바로 코 앞에 있을 때면 기어코 버스를 타겠다는 일념으로 탐크루즈처럼 버스에 매달렸다면, 한 발 내딛으면 닿을 거리에 있어도 쿨하게 버스를 떠나보내며 '너무 일찍 왔네....'하고 다음 차를 여유 있게 기다릴 줄 알게 되었다.
독서의 계절은 철떡 같이 가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무더운 여름이 독서하기 더없이 좋다는 스님의 말에 그 해 여름, 평소 잘 읽지도 않던 두꺼운 고전을 펼쳐 들기도 했었다.
분에 넘치게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나의 허물은 보지 못하고 타인의 허물만을 찾아 물어뜯지는 않았는지, 내가 무심코 뱉어내는 말들이 타인에게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는 않았는지 등 참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가던 시기였다.
그저 법정 스님 생각 따라 하기만 했을 뿐인데 매일같이 쫓기던 시간에서 쉼표로, 타인의 시선에서 나 자신의 내면으로, 집착에서 무소유로, 편견에서 이해로, 물(物)에서 자연으로 온전히 마음과 시선을 옮길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그때는 가능했다.
어느새 그때는 가능했던 것들이 지금은 갈수록 어렵기만 하다. 쉼표는 마침표로, 내면보다는 외면으로, 무소유보다는 소유로, 이해보다는 편견으로, 자연보다는 물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특히 할 필요도 없는 말들을 너무 많이 한다. 닥치고 경청을 해야 하는데 자꾸 입이 근질거린다. 타인이 한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내가 쏟아냈던 말들만 되새김질하고 있다. 한심할 노릇이다.
한때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스님들의 묵언수행을 따라한 적이 있다.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입을 꾹 닫고 웬만하면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나름 애썼다. 근엄한 표정으로 말이 별로 없던 내게 가족들과 직장 동료들은 다들 걱정하며 한 마디씩 던졌다. "너희 집에 무슨 초상났니?", "상사한테 야단맞았지?", "걱정 있냐?", "엄마, 화났어?"....'음....' 이렇게 나의 묵언수행은 몇 일도 못 가 실패로 끝났다.
수십 년 만에 책장 한편에 꽂혀 있던 무소유 책을 다시 펼쳐 본다.
무소유한 삶 자체였던 법정스님은 계시지 않지만 빗소리 깊어가는 이 밤, 이번에는 아주 느리게 그리고 천천히 스님의 말씀에 다시 한번 귀 기울이려 한다. '무소유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