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와 나
고흐는 자신의 한쪽 귀를 자르고 자화상을 그렸다. 나는 본의 아니게 두 번씩이나 귀를 잘라야 했고 자화상을 그릴 깜냥은 되지 않아 회고록을 쓰고 있다.
7년 전, 언제부턴가 오른쪽 귀에 난청이 시작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평소같이 소소한 일상을 얘기했지만 정작 나는 평소처럼 호응을 해 줄 수 없었다. 두 번까지는 못 들은 척 다시 물을 수 있었지만 이후에는 더 이상 묻기가 미안해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치로 대강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다. 흘려듣던 이야기들도 상대방이 하는 얘기를 몇 배나 집중해서 들어야만 했다. 미세한 어지럼증까지 동반했던 터라 결국 인근 병원을 찾았다. 의사조차 몇 주를 내 귀와 시름한 뒤에야 ‘진주종’이 의심된다며 상급병원 추천서를 써 주었다. 귀금속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나였기에 뜬금없이 진주라는 이름이 왜 이 시점에 등장하는지 이상하다 못해 기이했다.
바다가 아닌 귀 속에서 피어난 진주를 머금고 다니다 결국 그 해 가을, 진주가 더 이상 귓속의 뼈를 녹여 더 큰 진주를 만들어 내지 못하도록 귀를 절개하여 수술을 해야만 했다. 수술 후 퉁퉁 부어있던 부기가 가라앉고서야 한쪽 귀에 주먹만 한 붕대를 감고 있는 내 몰골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때 왜 고흐가 생각났을까?
귀를 자르고 붕대를 감고 있던 그의 자화상과 흡사한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면서 잠시나마 그가 느꼈을 통증을 이해하게 된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공감대가 생겨 났다. 그리고 그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관찰했듯이 마치 나와 다른 나를 대면하고 있는 듯한 묘한 느낌도 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왜 멀쩡한 자신의 귀를 도려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혹자는 그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단편적인 원인으로 삼기도 하지만 순간이나마 그와 같은 처지이고 보니 그가 또 다른 자아를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인간에게 귀는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생존 본능과 직결된다. 간혹 어른들 중에는 여러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라고 두 개의 귀가 있다는 나름의 사견을 덧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지나칠 정도로 불필요한 소모적인 말들과 헛소문들, 험담들, 가짜뉴스들로 서로를 불신하고 비방하며 오히려 더 큰 위험 요소들을 만들어 내어 역행하고 있다.
수술 부위를 고정시키기 위해 귀 구멍을 온통 솜으로 막아 놓은 덕에 잠시나마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 오롯이 내 몸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었듯이, 고흐도 세상의 번잡한 소음으로부터 벗어나 본연의 자신과 마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림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언젠가 고흐전에서 보았던 ‘별이 빛나는 밤에’, 어둠과 정적이 흐르는 밤에 그는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가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화려하고 찬란한 밤들을 보았을 것이다. 지금은 도시건 시골이건 밤이 되어도 대낮같이 환하지만 고흐의 시대는 밤이 깊을수록 달빛과 별빛이 등불 같은 시대였을 것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것을 소유해야 빛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하지만, 그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 행복, 미학을 자연에서 이미 찾아냈을 것만 같다. 모든 자연이 거대한 캠퍼스요, 그림이었을 것이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벅찬 희열을 느끼지 않았을까. 세상 사람들은 그가 불행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어쩌면 이미 완성된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작년부터 증상이 재발하여 미루었던 수술을 올해 초에 다시 받게 되었다. 동일한 수술을 두 번씩이나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 대상이 뭐가 되었든 원망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에 휘둘릴만한 병도 아니요, 사지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 보니 이만한 게 어딘가 싶어 오히려 감사하기만 하다.
병실에 있으면서 또 한 번 고흐를 떠 올렸다. 누가 보면 고흐의 광팬인가 싶을 정도로 이렇게까지 자주 떠올리게 될 줄은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희한한 접점에서 그의 인간적인 면과 고뇌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강한 색감처럼 한 시대를 열정적으로 강렬하게 산다면 세간에 비치는 삶이 어떠하든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다.
여유도 없이 흘려보냈던 과거의 시간들을 달빛과 별빛이 등불이 되는, ‘밤의 카페테라스’에서 남은 생을 어떻게 하면 고흐처럼 강렬하게 살다갈 수 있을지 다시 한번 내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