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세상

by 반디

오늘도 네모진 세상, 엘리베이터에서 낯선 혹은 낯익은 이웃들과 잠시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다. 생각해 보면 몇 분만에 지상과 천상을 오가는 신기한 요물이다. 먼 과거 사람들이 본다면 천국의 계단쯤으로 여기지 않을까 싶다.

스르륵 문이 열릴 때마다 들어서는 이웃들과 인사를 곧잘 하지만 타이밍을 놓쳐 버릴 때면 어색한 침묵만이 감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낯익은 이웃들과는 형식적인 인사 몇 마디는 주고받으며 어색함을 달래보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관심을 표하기는 서로 부담스러운 묘한 곳이다. 그러다 보니 조금 친근한, 그래봐야 '몇 층 아무개' 층수로 특정 지워진, 오랜 이웃이라도 매번 묻는 안부가 똑같을 수밖에 없다. 특히 한창 커가는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아이들의 키가 당연 단골 소재다.

"어머, 그 집 아들들은 어떻게 그리 키가 커요? 아빠가 키가 큰가 봐요.", "하하... 아빠는 키가 작은데 잘 먹어서 그렇죠 뭐.", "애들 쪼그마할 때 봤는데 그새 키가 훤칠하게 커서 어른이 다 되었네요.", "그렇죠, 이제 어른이에요."

반려견을 안고 타는 이웃이라도 만나면 동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시선이 절로 간다. 이때 한마디 안 해 줄 수가 없다.

"뿌꾸 산책시키고 오시나 봐요?", "얘가 산책 가면 힘들어하면서도 그렇게 나가고 싶어 하네요."

천 세대정도 되는 아파트이고, 한 개 동만 해도 몇십 세대이다 보니 친근하거나 무심한 이웃들도 있지만 때로는 볼썽사나운 과격한 이웃들을 만나기도 한다. 평소 딱히 마주칠 일은 없지만 랜덤박스처럼 엘리베이터 탑승객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어쩔 수 없다.

"이런 개XX, 내가 마! 그놈 쥑이삐고 나도 감옥 갈라니까..."

누가 있든 아랑곳 않고 침묵 속에 흐르는 전화 대화부터가 과격하다. 거기다 문신까지.

보이는 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되지만 일반 사람들이 흔히 할 수 있는 대화는 아니다. 감히 옆을 쳐다보지 못하고 심장만 콩딱 거린다. 그런 사람이 윗집이나 아랫집이라면 더욱 긴장하고 불편할 수밖에 없다. 층간소음으로 얼굴을 붉혀 본 이웃들이라면 엘리베이터가 오르내리는 그 짧은 시간도 길고 답답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웃들과의 관계가 부담스러운 소심한 이웃은 누가 타기 전에 얼른 닫힘 버튼을 누르기도 하고, 배려심으로 무장한 넉살좋은 이웃은 혹시라도 뒤이어 오는 사람은 없는지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기도 한다. 엘리베이터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부러 걸음을 빠르게도, 늦추기도 한다.

어쩌다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대가 비슷해 자주 마주치는 이웃들은 아무리 무심한 사람이라도 관심이 가게 마련이다. 차림새로 이웃의 성격과 직업을 추측해 보기도 하고, 본의 아니게 취향을 엿보기도 한다.

엘리베이터 세상은 한 평도 채 되지 않는 좁고 폐쇄된 공간이다 보니 다양하고 진한 삶의 냄새가 항상 묻어 있다. 어떤 날은 연인을 만나는 설렘과 같은 진한 향수 냄새, 학생들의 젊음과 같은 풋풋하고 싱그러운 샴푸 냄새, 여름철이면 제 때 말리지 못한 눅눅한 옷냄새, 고된 일상을 살아낸 징표 같은 땀냄새, 또 어떤 날은 냄새만으로도 허기를 채워줄 것 같은 배달 음식 냄새, 조금 늦은 시각에는 복잡한 심경만큼이나 여러 냄새가 엉켜있는 술냄새, 대강의 생활이 짐작 가는 감지 않은 머리 기름 냄새, 깊숙한 폐부로부터 올라온 한숨같은 담배냄새....

로맨스 드라마나 공포 영화를 보면 엘리베이터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만큼 엘리베이터 세상은 무심한 듯 하지만 따뜻한 공간이면서 무서운 공간이기도 한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천상으로 오르는 티켓 값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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