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 운전 처벌법 강화를 촉구하며...
3년 전 8월의 어느 날 아침, 출근을 준비하고 있는데 부산에 사는 큰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른 아침부터 걸려오는 전화는 항상 예감이 좋지 않다. 웬일 인가 하고 전화를 받았더니 큰언니는 우느라 말을 제대로 잊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가... 엄마가... 많이 다치셨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목소리 떨림에서 보통 사고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때 당시 친정어머니는 여든이 넘는 연세셨고 사고가 났다면 어머니의 생사와 관련된 것이었기에 더욱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인데!"
묻는 나도 목소리와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교통사고가 나서... 지금 119 타고 병원으로 가고 있는데... 많이 다치셨다..."
"어쩌다가!... 어쩌다가..."
나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새벽에 절에 다녀오시다가 음주 운전 차가 엄마가 타고 계시던 차를 뒤에서 박았단다... 우리 엄마...어떡하노..."
큰언니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라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많이 다치셨는데?!"
"많이 위독하시다...어떡하노... 우리 엄마..."
병원 도착하면 다시 연락을 주고받기로 하고 큰언니와 통화를 끝냈다.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남편에게 대충 상황을 얘기하고 잠시 안방에 앉았는데 그제야 현실감이 왔는지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별일 없을 거라는 남편의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발 여기서 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만을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일단 출근은 했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건 당연하고 연락이 올 때까지 초조하게 기다렸다. 얼마 뒤 큰언니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부산대학병원 응급실에서 다행히 받아주어 저녁때쯤 바로 수술에 들어간다고 했다. 뒤에 들으니 보통의 대학병원은 생명이 위태로운 응급 환자 이외에는 잘 받아주지 않지만 워낙 생사를 다투는 응급 상황이라 받아 준 모양이었다.
오전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마무리하고 바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제발 현실이 아니기를, 그저 깨어나면 한낱 꿈이기를 바랐다. 현실이라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극단으로 치닫으려는 생각과 마음을 최대한 진정시키고 돌아가시지 않은 것만으로도 위로를 삼았다.
도착하니 응급실 면회는 되지 않는 상황이었고 수술실 앞 가족 대기실에서 다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들을 보자 속으로 참았던 눈물이 둑 터지듯 하면서 터져 나왔다. 언니들은 많이 울어서 이미 벌게진 눈으로 나를 보자 또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내 평생 그렇게 오열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때 감정이 올라와 눈물이 난다.
언니, 오빠, 형부, 조카들까지 수술실 전광판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것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무력했다. 수술이 시작되었다는 전광판이 뜨고 거의 대여섯 시간 정도 지나 자정이 거의 다 되어서야 수술은 종료되었다. 살아오면서 가장 긴 하루였다.
평소 새벽 세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목욕재계하시고, 불경을 읖으시고, 새벽 예불에 참여하시고 돌아오시는 게 친정어머니의 수십 년간 생활 루틴이셨다. 40대 초반에 홀로 되어 억척같은 생활력으로 자식들을 키워내셨던 어머니는 절에 다니신 이후로 종교를 넘어 마치 부처가 되신 것 같았다. 종교는 어머니에게 있어 힘들고 지난한 삶을 살아내기 위한 원동력이자 부적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날도 새벽 예불을 같이 다니시는 보살님이 태워주시는 차를 타고 집 앞 도로에 정차하여 막 내리시려던 찰나 음주차량이 뒤에서 들이받았다고 한다. 어찌나 심하게 박았던지 당시 어머니가 어깨에 메고 다니시던 가방 끈이 다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충격으로 어머니는 앞 좌석까지 튕겨져 나가 그 길로 정신을 잃으셨고, 운전석에 있던 보살님은 어깨와 흉부 골절상을 입으셨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뉴스로만 보던 비현실적인 일들이 현실이 되어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리던 음주 운전 피해자가 우리 가족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제야 피해자 가족들이 겪었을 공포와 감정들을 절절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가해자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원망과 증오가 뒤얽혀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똑같은 고통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허리와 둔부 골절, 함몰된 안면 일부 등 크나 큰 수술 후 어머니는 기적적으로 생환하셨다. 응급실에서 생과 사를 오가며 홀로 고독한 싸움을 결국 이겨 내셨다. 일반 병실로 올라오신 후 큰언니는 생업을 잠시 접고 병원에서 쪽잠을 자며 몇 달을 어머니 병간호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당시 큰언니네 막내 조카가 수능을 바로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도 망설임 없이 어머니 곁을 지켰다. 어머니의 고통에 찬 신음과 대소변을 온전히 다 받아내면서.
코로나 상황이어서 일반 병실 면회도 잘 되지 않아 어머니 병세가 조금 호전되고서야 아주 잠깐 면회를 할 수 있었다. 얼굴 전체에 시퍼런 멍이 들어 퉁퉁 부은 얼굴로 누워 계신 어머니는 낯설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차마 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엄마... 조금만 참으면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아 드렸다. 온기가 느껴졌다. 아직도 어머니 손에 온기가 있다는 것에 안도와 감사를 하며 병실문을 나섰다.
어머니 사고 이후 가족들은 모두 예전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사고 전의 평범했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밥을 먹어도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았고, 병실에서 사투하고 있을 어머니와 큰언니 생각에 밤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일상이 무너져 내렸다. 큰 언니네는 큰언니가 없는 빈자리를 큰 형부가 메꾸고 조카들을 챙기느라 바쁘셨고, 오빠는 경찰서와 보험사를 오가면서 변호사와 민형사 소송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작은 언니도 틈만 나면 면회를 갔고, 나는 타 시도에 있다는 이유로 마음으로 밖에 보탤 수가 없었다.
큰언니는 어머니가 종교의 힘으로 버텨내실 수 있도록 평소 어머니의 루틴처럼 경전과 스님들 법문을 유튜브로 매일같이 보여주며 극진히 보살폈다. 어머니만큼이나 큰언니도 부처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일로 나에게는 존경하는 인물이 어머니 한 분에서 큰언니까지 두 명이 되었다. 가족들 모두 어머니가 회복되시기까지 정말 많이 힘들었지만 고통을 다 같이 이겨낸 만큼 가족 간의 끈끈했던 정은 접착제처럼 더 강해졌다. 평소 다소 무심했던 가족 사랑도 더해졌으며,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여기며 전화도 잘하지 않던 나 역시도 이틀에 한 번씩은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고 있다. 전화를 드릴 때마다 어머니는 잊지 않고 하시는 말이 있으시다.
"아이고 우리 딸, 전화 줘서 고맙네. 사랑한다 우리 딸~"
"엄마... 엄마가 살아있어 줘서 내가 항상 고마워요... 사랑해요, 엄마."
하루가 멀다 하고 음주운전으로 인해 부모님이, 자녀가 죽어가고 있다. 가족이 해체되고, 평온한 일상이 깨지고,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머릿속에 각인되어 버린 트라우마를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도 어제도, 오늘도 경찰차까지 따돌리며 무법천지로 종횡무진하고 있는 음주운전 차량들이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총기만큼이나 무서운 것일진대 총기만큼 단속과 처벌을 강화하지 않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 솜방망이 같은 음주운전처벌법이 강화되지 않는 이유는 국회의원들이 음주운전을 많이 하기 때문이라는 자조 섞인 풍문도 있다. 그만큼 음주 운전이 일반화되어 있다는 말일게다.
내 가족은 그럴 일이 없을 거라는 안이한 생각은 제발 갖지 않았으면 한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라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
어머니 사고를 겪으면서 음주 운전에 대한 경각심을 담은 글을 꼭 한 번은 쓰고 싶었다. 소설 형태로 쓸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첫 단편소설 도전작이 되었다. 처음으로 소설이라는 것을 쓰다 보니 온전한 마음을 모두 전달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허접하고 엉성한 소설을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함을 전한다.
그리고... 음주 운전으로 희생되신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그 가족분들께 심심한 위로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