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나방 04.(최종화)

도전, 초단편 01

by 반디

희뿌연 연분홍빛 노을 속에 저 멀리 해운대 고층빌딩들이 반딧불이 같은 빛을 뿜어 내고 있다. 주연과 화영은 연신 힘겨운 숨을 토해내며 깎아지른 듯한 봉래산 비탈길을 한발 한발 오르고 있었다. 규원의 49제 새벽기도를 올리기 위해 동트기 전 복천사로 향하는 길이었다. 평소 화영이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가끔씩 찾던 절이었다. 주차장까지도 난코스였지만 이후로도 끝이 없는 오르막길에 도착도 전에 주연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잠시만... 헉헉... 잠시만... 쉬었다 가자... 헉헉... 뭔 놈의 절이 이래 높은데 있노."

"알았어. 조금만 쉬었다 가자. 이제 거의 다 왔어."

주연은 거친 비탈길에 저절로 발이 꺾여 힘을 주느라 땅만 보며 걷다 보니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나지막한 바위틈에 앉아 잠시 쉬면서 그제야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간 주연은 알 수 없는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처음 와보는 곳인데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내가 언제 여기 함 왔더나?"

"절도 안 댕기는 사람이 언제 와 봤을라고."

"그렇겠제..."

숨을 고르고 10분쯤 더 걷다 보니 마치 한옥호텔같이 생긴 이삼 층의 복층 사찰이 모습을 드러냈다. 석축으로 쌓아 올린 기단 위에 석가모니가 중생을 내려다보듯 고요하고 단아한 절이었다. 천왕문 앞에서 화영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정성스럽게 반절을 했다.

경내로 들어서니 대웅전 입구가 정면으로 보이고, 그 앞으로 3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었다. 석탑에 모인 염원들이 유리관 안에서 환하게 불타고 있었다. 산사의 발치 아래는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현대와 전통, 빛과 어둠, 현재와 과거, 실재와 허상이 하나의 경계를 두고 교차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주연은 마당 한편에 서서 깊은 생각에 잠기며 먼 하늘을 응시했다. 그 사이 석탑 앞에서 촛불을 켜고 있던 화영이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네며 주연에게 소개했다.

"여보, 주지스님이신 윤희 스님이셔. 인사드려."

"안녕하십..."

"잠깐만, 니 방금 뭐라고 했노? 윤희스님?"

"와? 아시는 분이가?"

"그럴 리가... 그럼 여기가... "

주연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심장이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반쯤 숙였던 고개를 조심스레 들어 윤희 스님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윤희 주점 주인과는 하나도 닮은 꼴이 없는 얼굴이었다. 주연은 마치 판이 정해진 퍼즐조각을 하나씩 맞춰가고 있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다시 스님을 향해 합장했다.

'분명 여기가 거기 같은데... '


새벽 기도를 마치고 나왔는데도 하늘에는 잔뜩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비라도 한바탕 퍼부을 것 같은 날씨였다. 해 뜰 시각이 지났는데도 경내는 무덤처럼 고요했다. 산세가 험한 곳에 위치하기도 했고 새벽 시간대라 그런지 주연과 화영 외에는 드나드는 인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 왔는지 석탑 앞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초에 불을 켜고 있었다. 마치 성스런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초등학교 3학년쯤으로 보이는 나이에 자그마한 키, 똘망한 눈매를 가졌다.

주연은 어릴 적 규원의 환영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웬일인지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손수건을 연신 눈가로 가져가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먼발치에서 아이를 지켜보았다. 촛불 의식이 끝났는지 갑자기 아이는 주연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해맑은 표정으로 한동안 주연을 쳐다보더니 어둠 속으로 총총거리며 뛰어갔다. 아이가 뛰어간 방향 끝에 붉은색 옷을 입은 젊은 여자가 멀리서 주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웃는지, 우는지 모를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달려오는 아이의 손을 잡고 여자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얘야 잠깐만! 얘야!"

주연의 목소리만 어둠 속에 잠길 뿐 그 어디에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주연은 경내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미친 듯이 불렀다. 옆에 서 있던 화영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와 이라노?"

"화영이 니도 봤제? 어린 아. 방금 저리로 뛰어가던 아."

"무슨 말이고... 무슨 아? 요즘 와 계속 헛소리하고 그라노... 가뜩이나 힘든데..."

"저기 석탑 앞에 촛불..."

"애 먼 소리 하지 말고 비 올라는 갑다. 어서 서둘러 내려 가자."

"그럴 리가 없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자동차 시동을 켠 상태로 주연은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환영도 그렇고 우연의 일치라고는 믿기 어려운 산사에서의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차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뱀의 배속을 훑듯이 구불구불한 내리막길을 서서히 내려갔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사이드미러에 뒷 차량의 불빛이 반사되었다. 검은색 승용차였다. 주차장은 분명 텅 비어 있었고 산사로 연결된 다른 우회도로는 없었다.

핸들을 붙들고 있는 주연의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주연은 백미러로 계속해서 흘끔거리며 뒤 차를 주시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던 찰나에 갑자기 검은색 승용차가 속도를 내며 바짝 따라붙었다. 곧 들이받을 기세였다. 간격을 벌리기 위해 주연도 속도를 올렸다. 검은색 승용차는 멀어질만하면 속도를 더 올려 계속해서 따라붙었다. 급기야 회전구간에서 주연의 차에 충격이 가해졌다.

"아악! 뭐야!"

"화영아, 꽉 잡아라이! 아무래도 미친 새낀갑다!"

도로 옆으로는 천길 낭떠러지였다. 핸들을 조금이라도 까딱 잘못 틀면 그대로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 칠 터였다. 주연이 핸들에 아무리 힘을 주어도 충격이 주어질 때마다 핸들이 심하게 흔들렸다. 주연의 소나타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술 취한 사람처럼 심하게 비틀거렸다.

"쿵! 쿠쿵!"

"악! 아아악!!"

"어.... 어어어.... 안돼!!"

주연의 차는 튀어 오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허공을 가르며 다이빙하듯 숲 속으로 추락했다.

"......"

주연은 깨진 앞 유리차창으로 검은 정장 사내가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검붉은 피가 주연의 눈으로 흘러들어 시야를 가렸다. 주연이 아무리 눈을 부릅뜨려고 해도 자꾸만 눈이 감겼다. 웃고 있는 사내의 모습도 검붉게 변해가고 있었다. 조수석의 화영은 고개가 꺾인 채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화영아... 으으윽... 개새끼...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대체... 왜..."


"환자분! 환자분! 정신 차리세요! 이 환자분 어떻게 오시게 됐죠?"

"새벽 두 시경에 음주 운전으로 맞은편 차량과 정면 충돌했습니다. 맞은편 차량은 아이포함 일가족 세 명이 그 자리에서 모두 사망했고, 음주 차량 가해자입니다."

"후유... 원..."

주연은 또렷하지는 않지만 웅웅 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주고받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몸은 납덩이처럼 묵직해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뿌연 불빛이 주연의 시야로 잠시 들어왔다. 어렴풋하지만 '윤희 병원'이라 적힌 의사 가운도 잠시 보였다 사라졌다.

"환자분, 정신이 드십니까? 환자분! 성함 얘기해 보세요!"

"....."

주연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뿌옇던 불빛마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암흑 천지였다. 의식은 심해로 한없이 끌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심해의 어둠 속 저 멀리서 검은색 승용차가 다가와 주연 앞에 섰다. 핏기 없는 파리한 얼굴로 주연은 말없이 조수석에 탔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검은 정장 사내가 물었다.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되었나? 어디로 모실까?"

"...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검은 정장 사내가 씩 웃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짙은 어둠 속으로 차는 서서히 사라지며 어둠과 하나가 되었다.

"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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