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아는 것들

시간과 경험이라는 진정한 교육자.

by 반디

나이 지긋한 직장 선배와 야근을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선배가 "요즘은 입에 구멍이 난 것처럼 음식이 자꾸 입 밖으로 흘러 내려서 큰일이야."라며 울상을 짓는다.

아닌 게 아니라 나 역시도 최근 들어 그런 것 같아 공감이 되었다. 예전에는 당최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세월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이해되는 것들이 있다. 마치 부모가 되어봐야 부모의 심정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철없던 시절에는 경험치도 거의 없는 나의 관점으로 세상을 재단하며 나도 모르게 상대에게 불쾌한 표정을 짓거나 면박을 주기도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볼썽사나웠을까 싶다.

어릴 적 외할머니댁은 지척에 있는 거리였다. 결혼해서도 가난에 힘겨워하던, 막내딸이었던 친정어머니가 안쓰러우셨는지 외할머니는 김치며, 과일이며, 반찬이며 틈틈이 가져다주시고는 하셨다.

한 번은 다 같이 저녁을 먹으려고 둘러앉았는데 외할머니께서 김치를 손으로 죽죽 찢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손가락을 쪽쪽 빠시면서. 순간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이 더러워! 나 김치 안 먹을래!"

나를 비롯한 형제 지간 어느 누구도 선뜻 김치에 손을 대지 않았다. 다들 벌레라도 씹은 표정으로 외할머니 곁을 멀찍이 피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몸져누우시는 법 없이 활동적이셨고, 여름이면 늘 하얀 모시적삼을 빳빳하게 다려 입으시던 분이셨다. 허리까지 내려오던 백발을 매일같이 감으시고는 빗질에 머리기름까지 바르고서야 쪽머리를 틀어 올려 은빛 비녀를 꽂으셨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까마득한 옛날이지만 그만큼 정갈하고 깔끔하신 분이셨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이해되기에.

오히려 새 김치를 꺼낼 때마다 "역시 김치는 죽죽 찢어 먹어야 제맛이지!" 하며 손가락이 발갛게 물들 때까지 어느새 김치를 찢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새삼 오랜 기억 속에서 소환된 외할머니께 죄송스럽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미완의 인간들이라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일지라도 본인들이 경험한 테두리 안에서 타인들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거나,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이해의 폭이 넓은 편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생이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하기에는 너무 짧기도 하고, 처한 상황이 모두 다르고 제약 조건들도 너무 많다. 그러다보니 어느 누구도 상대를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힘들다.

나보다 어린 젊은이들을 볼 때면 젊을 때 많을 것을 경험해 보라고 늘 얘기한다. 설사 아프고 힘든 경험들이라도 그만큼 생각이 넓어질 뿐만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는 폭도 넓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사람들이 아무래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지 않겠는가.

한창 혈기 왕성하던 대학교 1학년때 용돈도 벌고 수줍은 성격도 고칠 겸 해서 부러 아르바이트를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한 적이 있었다. 대부분은 일자리를 구하기가 쉬운 육체노동이었다. 편의점, 뷔페, 닭갈비집, 카페, 피자집, 타이핑,...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했던 아르바이트였지만 목적보다 더 귀한 것을 얻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해당 직종에 근무하시는 분들의 수고로움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편의점에서는 하루 종일 제대로 앉지 못하고 일하시는 마트 캐셔분들의 수고로움을, 뷔페에서는 전쟁터에 남겨진 잔해들을 치우듯,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식기류들을 식기세척기를 돌리고도 하루 온종일 물에 손을 담그고 있어야 하는 분들의 수고로움을, 닭갈비집에서는 묵직한 쇠철판의 무게만큼 육체노동에 대한 수고로움을, 카페에서는 손님이 없을 때 사장님이 느꼈을 한숨을, 피자집에서는 무더운 한여름에도 불 앞에서 떠날 수 없는 분들의 수고로움을.

나의 경험은 극히 적은 것이었지만 아직도 그런 직종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보면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슬며시 음료라도 하나 건네드리고 싶다.

우리는 일상에서 상대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평하는 경우가 많다.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사람을, 직업을 평하기도 한다. '라테는~'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고리타분하고 시대에 뒤처진 사람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시간과 경험의 흐름 속에서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 시간과 경험으로 살아왔던 분들의 말들을 한 번쯤은 곱씹어 보자. 지금은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미래의 어느 날은 이해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 어느 날,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본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교육자는 '시간'과 '경험'이 아닐까 홀로 정의내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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