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일기 02.(우리 가족은 외계인)

그림: 큰아들님, 글: 큰아들님 엄마

by 반디









우리 가족은 전쟁 중...


주방 총대장 엄마,

집안 총대장 아빠,

만년 이등병 나와 동생.


하지만 아빠 총대장은 엄마.







큰 녀석 사춘기 시절, 내가 제일 무서워 보였나 보다.

한때는 '보살'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인상 좋다는 말을 많이 듣고는 했는데 언제부턴가 미간에는 골이 파이고, 세파에 찌들어 과거의 '보살'은 어느새 승천하신 지 한참이다. 원래도 쳐져 있던 눈만 더욱 처져 해탈하신 부처님 닮은 꼴도 되지 못하고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심봉사가 되기 일보 직전이다.

외모도 큰 녀석은 남편과, 작은 녀석은 나와 붕어빵이라 두 녀석이 어릴 때는 심심찮게 편 가르기를 하기도 했다. 소소한 말들은 유쾌하게 넘기다가도 어떤 때는 작은 불똥이 큰 불씨가 될 때도 있었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남편덕에 상대적으로 집안의 앵그리 버드는 늘 내 몫이었다. 딸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 남자들만 득시글 거리는 것도 적응하기 어려운데 세 남자들의 정신세계는 더욱 이해 불가였다.

남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젊은 시절부터 낯선 사람들이 말을 붙이는 것도, 본인이 말을 섞는 것도 질색해 웬만한 사람들은 말도 붙이지 못했다고 한다. 남들과 다르게 나에게는 자상하고 살가운 남편이지만, 간혹 가다 보이는 냉정하고 냉소적인 모습에 남보다 못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큰 녀석의 사춘기는 앞서의 글에서도 짐작하셨겠지만 어떤 날은 맑았다, 어떤 날은 폭풍우가 몰아쳤다, 또 어떤 날은 번개가 쳤다,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는 정말 외모만 친숙한 외계인 같았다.

둘째 녀석은 그나마 무던한 성격이라 뭘 해도 별 말이 없었다. 문제는 무던해도 너무 무던하다는 것이었다. 옷에 단추가 떨어져도, 양말이 닳아 구멍이 나도, 신발 밑창이 너덜거려 비가 새어도, 신발 끈이 풀려 있어도, 입을 옷이 없어도, '발견'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말이 없다. 한여름에는 긴 운동복, 한겨울에는 반바지. 계절을 거꾸로 가는 건 덤이었다.

이런 낯선 외계인들 사이에서, 우리는 서로 지구인이라 자부하며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조용한 평화가 찾아오는 날은 다 같이 동면에 들었거나, 다른 행성의 외계인들을 만나러 나갈 때였다.

어느새 다들 세월을 먹고 전형적인 지구인으로 변모하고 있다. 앵그리 버드였던 나는 새의 모습을 탈피하고 볼 빨간 중년으로, 남편은 묵직한 애교쟁이로, 큰 녀석은 더 큰 어른 녀석으로, 작은 녀석은 본격적인 외계인으로.

어릴 적, 늦은 저녁까지 숨죽이면서 봤던 미국 드라마 'V(브이)'.

비슷한 연배이신 분들은 거의 기억하실 것이다. 파충류 외계인들이 인간의 탈을 쓰고 접근하여 지구인들을 식량으로 삼는, 상상력 끝판왕 SF영화였다. 꿈틀거리는 쥐를 간식 삼아 입안으로 밀어 넣던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결국 외계인들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외계인 대 지구인과의 살벌한 전쟁이 시작된다.

우리들 중에도 혹 인간의 탈을 쓴 외계인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 외계 행성에서 온 존재일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낯선 외계인. 어른이 되면서 지구인화되어 가는지도.

끝날 것 같지 않던 전쟁도 이제는 끝이 보인다. 그런데... 정작 이 전쟁이 끝나면 그때의 그 전장과 전투와 이등병들이 너무 그리워질 것만 같다. 그래서 미리 한마디 남긴다.

아들아, 완전한 지구인이 되었을 때 엄마, 아빠는 지구를 떠날 테지만
한때는 너희들의 사령관이자, 동지이자, 영원한 아군이었던 우리들을 조금은 기억해 주렴.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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