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의 순간(1) 영아기의 기억은 왜 휘발될까
아이를 낳고 나는 내 기억의 저면을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것 같은 생각을 했다. 누워서 버둥거리는 갓난아기의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의 전적인 도움 없이는 먹지도, 움직이지도, 씻지도, 잠도 잘 수 없는 무력한 존재를 엄마라는 존재로 끊임없이 관찰할 수 있었다. 내 몸에서 이제 타인으로 옆에 와 있는 나의 아이. 그러나 어쩌면 한참 오랜 시간 동안 나와 그 아이를 동일시하면서, ‘아, 내 기억에서는 사라진 과거에 나는 이랬구나’하면서 생각에 잠기곤 했다.
심리학에서는 영아기의 기억을, 생의 초기 기억을 못 하는 것을 ‘영아기 기억상실증’이라고 부른다. 뇌 발달의 측면과 언어의 부재 등으로 이유를 설명하기도 하고, 또 기억을 못 한다기보다는 감각적인 형태로 영아의 몸에 저장된다는 설명도 있다.
모두가 그 나름대로 설득될 만한 좋은 이론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내가 육아를 해 보니, 생의 첫 시간에 누린 사랑이 너무 커서 어쩌면 신이 그 기억을 지워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꾸만 해본다.
물론 내 사랑의 크기에 비례해서 라기 보다, 영아기에 무력함에 반비례해서 무조건적으로 누린, 전적인 의존에 주어진 사랑이 너무 크다는, 그런 생각 때문에!
작고 무력한 존재가, 누군가의 한없는 희생과 도움을 힘입어 성숙한 성인으로 잘 자라는 데에 걸리는 20여 년 이상의 시간.
만약 온전한 어른이 되어서 자신의 영아기 시간들에 대한, 전적으로 의지해야 했던 시절에 너무나 컸던 부모라는 존재와 희생과 헌신의 기억이 온전하다면? 빠짐없이 기억이 남아있게 된다면?
그 희생에 대한 깊은 감사에, 또한 빚진 마음에, 성인이 된 이후의 시간은 부모님에게 그 은혜를 갚아 나가는 데에 자신의 삶을 다 써버릴지도 모르겠다ㅡ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해 주는 입장이 되니, 이게 심플한 일도, 애정만으로 주게 되지도 않더라.
보상없는 애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 메커니즘으로 부모라는 존재는 기꺼이 나였던 타인인 자녀를 돌본다. 시간, 돈, 체력. 그야말로 희생은 필수.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 누리고도 기억해 낼 수 없기에 어쩌면 그래서 너무 쉽게 부모의 품을 떠나는, ‘독립’이 가능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독립은 성숙한 성인으로서 건강히 잘 자랐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겠다.
둥지를 떠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는 새가 되어 훨훨 날아가는 것, 그것을 가로막지 않는 것, 그게 부모의 마지막 역할일테지.
처음 이런 생각을 할 때는 부모님 사랑이 정말 컸구나, 이렇게 내가 아이를 키워보니 알겠다는 생각으로 효도게이지(?)가 한참 올라왔는데, 내 자식 키우기에 바빠 아직도, 여전히, 갚아 나가지는 못하고 산다.
나는 내 자녀도 부디 그 휘발된 망각의 시간들을 누리길 바란다. 나를 떠나 다른 곳에 둥지도 틀고, 짝을 찾아 날아가기도 하고, 원하는 곳까지 아름답게 비상하는 것이면 충분하다. 나에게 은혜를 갚지 말고, 너를 위해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무의식에 잠식된 자녀의 영아기 기억은 꺼내 볼 수 없겠지만 자녀를 키우면서 그 기억이 어떤 사랑이었는 가늠해 보길 바라다 보면, 먼 훗날 나에게도 예외 없이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 사랑은 없다’는 옛말이 현실이 될 것을 짐작한다.
그 신비에 오늘도 위로도 받고 감사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