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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은 Mar 26. 2024

육아가 외로워 시집살이를 택했다

우리 어머님은 혹독한 시집살이를 하셨다.

어머님의 시어머니, 그러니까 내 남편의 할머니와 같은 대지를 공유하는,

창문 열고 "아가~"하고 부르면 "네~"하고 대답해야 하는 집에서 30년 동안 시부모님을 모셨다.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시집 온 어머님.

베트남전에서 하반신 마비가 된 시아버지의 손과 발이 되었다.

시댁의 대소사를 관리하고, 몸이 불편한 시아버지의 병간호를 했다.



이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효성 깊은 며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은 시어머니의 혹독한 시집살이에 눈물, 콧물을 쏟으셨고 이명, 불면증, 우울증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계신다.



본인이 겪은 시집살이를 며느리에게는 되물림하지 않으시려는지 첫 만남 때 내게 말씀하셨다.



"딸은 딸이고, 며느리는 며느리다."



내게 설거지 한 번 제대로 시키지 않으셨고, 명절 음식, 가족 모임도 일체 맡기시지 않으셨다.

지극한 손님 대접에 감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서운했다.



소위 말하는 며느리의 도리도 바라지 않으셨지만 며느리에 대한 정도 주시지 않으셨다.



어머님을 지독하게 힘들게 했던 두 어른이 차례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께서도 돌아가셨다.

워낙 혹독한 시집살이라 두 어른의 죽음을 슬프게 받아들이는 식구는 많지 않았다.



중요한 건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사시던 집이 비었다는 것.



30년도 더 된, 빨간 벽돌로 지어진 낡은 주택 1층이었다.

집 내부는 내가 유치원 다닐 때나 보았던 나무 벽면이었고, 좁은 욕실은 남편이 허리를 펴고 씼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곰팡이가 슬었는지 쾌쾌한 냄새도 났다. 집 주변엔 아이에게 사람 친구보다 고양이 친구를 더 많이 소개해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집이 탐이 났다.

거기에서 살고 싶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남편은 극도로 싫어했다.



아이 4살까지 남편과 나, 오롯이 둘이서만 육아를 했다.

친정은 바쁘고, 시댁은 어렵고.

꾸역꾸역 둘이서 육아휴직을 번갈아 해가며 아이를 키웠다.



힘든 것보다 참 외로웠다.



이러다 나도, 아이도 망가질 것 같았다.



당시 아이를 키우고 있던 신혼집은 신도시의 신축 아파트.

나와 남편도 아파트에 살아보기는 그때가 처음.

그 신혼집을 참 좋아했던 남편의 원망을 뒤로 하고 무작정 비어있는 할머니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하던 날 아침 7시부터 이삿짐 센터 사람들이 짐을 쌌다.

남편은 눈으로 나에게 욕을 했다.



시누랑 신경전도 있었다.

내가 그 집이 탐이 났던 만큼 시누도 그 집에 탐을 냈다.

시어머님 언덕에 비벼보려는 마음.



두 눈 꼭 감고 모른척 했다.

시어머님도 내심 딸이 들어왔으면 하셨다.



아이도 둘이고, 몸도 안 좋은 언니에게 미안했지만,

딸과 외손녀와 함께 살고 싶으신 어머님께 죄송했지만,

가 먼저 살아야 했기에.



그렇게 3년을 보냈다.



종종 남편의 원망과 한숨을 듣긴 했다.

그래도 그 집에서 정말 재미나게 3년을 보냈다.



주택이라 할 수 있는 것,

1층이라 할 수 있는 것,

낡은 집이라 할 수 있는 것,

부모님이 함께셔서 할 수 있는 것들 맘껏 했다.



집 안에서 줄넘기, 공놀이도 신 나게 했다.

인테리어랑 어울리지 않는 액자도,

아이의 낙서같은 그림도 붙이고 싶은 대로 붙였다.



좁고 낡은 마당이지만

여름이면 물총싸움도 하고 수영장도 만들었다.

봄, 가을이면 고기파티도 했다.

잠시 잠깐 텃밭에 식물도 길러봤다.



늘 사랑이 고픈 아이는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 한껏 받으며 유치원을 마쳤고

나와 남편은 시어머님 덕분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출근했다.



무엇보다 내가 외롭지 않았다.



아이가 열이 나면,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하면,

아이가 친구에게 맞았다고 하면,

늘 혼자 전전긍긍했다.



어머님 곁으로 가고 나선 어머님께 달려갔다.



든든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참다참다 아이 학교를 그곳에서 보낼 순 없다는 남편의 강력한 주장에 결국 다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사하던 날 아침, 남편은 신이 났다.

그 집에서 살던 3년 간 그렇게 활기찬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는 어미님을 안고 눈물 찔끔 흘렸다.



어머님은 안 우신 것 같다.



그래도 결혼 8년째 처음으로, 생일 축하 문자 끝자락에 세 글자를 남기셨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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