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 찾기 #1
작년 6월쯤 늦은 퇴근길에 있었던 일입니다.
야근을 하고 밤 10시를 넘긴 시간, 강남역 버스정류장에서 줄을 선 채 용인으로 가는 좌석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다행히 저는 우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내리는 비를 맞을 수 밖에 없었죠. 그렇게 서 있던 중, 갑자기 옆에서 한 여자분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여기 용인가는 버스 줄 맞나요?”
고개 돌려 바라보니 40대 후반에서 5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반정장 스타일의 여자분이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네.”하고 짧게 대답하는데 이 여자분, 갑자기 제 우산 속으로 무찔러(?) 들어오며 말을 잇습니다.
“어휴~ 비가 제법 오네. 줄이 짧은걸 보니 버스가 떠난지 얼마되지 않았나봐요? 잠시 우산 같이 써도 돼죠?”
순간적으로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아무리 저보다 조금 더 연배가 있어 보인다 할지라도(액면가로는 저도 만만치 않습니다만...) 머리털 나고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거든요. 뭐, 제가 외모가 잘 나거나, 키가 훤칠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혹 몸매라도 봐줄만 하다면, 여러 사람들 중에 간택(?) 받았을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런 조건이 아예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택하시다니요... 대답을 못하고 주저하는 사이, 그 분은 이미 제 우산 안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어색한(어쩌면 저 혼자만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 침묵을 깨고자 아주 평범한 질문을 하나 드렸습니다.
“저... 혹시 무슨 일 하시는지요?” “아, 조그만 사업 하나 해요.”
“아, 네... 요즘 경기가 너무 안좋아 많이 힘들지 않으세요?” 그 질문을 한 후 당연히 ‘아, 정말 경기가 안 좋다 보니 많이 힘드네요. 언제쯤이나 경기가 좋아지려는지...’ 하는 대답이 나올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나온 답변은 제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사람들이 경기가 안 좋아 사업도, 장사도 안된다고 말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사업은 경기와는 상관없어요.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경기가 안 좋아도 잘 할 수 있어요.”
그 대답을 듣자 갑자기 흥미가 솟아났습니다. 무슨 노하우가 있길래 이렇듯 자신있게 말씀하시는 건지 말이죠. 그때 마침 버스가 왔고, 이번에는 제가 들이(?)댔습니다.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가도 되겠느냐고 말이죠. 괜찮다고 하시길래 같이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그 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중소기업에 취직했고, 3년 정도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네요. 그러면서 든 생각이 자신의 사업을 해보고 싶더랍니다. 그래서 사장님께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달라고 했답니다. 아웃소싱으로 키워보겠다고 말이죠. 그녀에 대한 신뢰때문인지 사장님은 허락을 했고, 그녀는 아웃소싱 회사를 설립함과 동시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사업을 하고 있다 하시더군요. 현재는 결혼관련 사업을 하고 있고, 여성 CEO로써 몇 권의 책도 출간했으며 신문에 칼럼 연재와 더불어 종종 강연도 다니고 있다 했습니다.
듣다보니 캐리어가 장난 아니더군요. 신기했습니다. 이런 분을 우연히 (우산 속에서!) 만나 이렇게 버스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다니 말이죠. 이야기 도중 그녀가 제 직업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20년째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고 대답하니 얼굴 표정이 약간 흔들리며 얼마전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욕실의 타일이 깨져 수리하시는 분을 불렀답니다. 기술자 2명이 와서 고치는데, 그중 한명이 아무리 봐도 고등학생 정도 밖에 되어 보이지 않더랍니다. 궁금증이 발동하여 학교는 어떻게 하고 이렇듯 평일에 일을 하느냐 물어보았더니, 공부는 전혀 관심이 없어 학교는 자퇴했고 현재는 아버지를 따라 기술을 배우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면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학교를 그만두고 일 배우러 다니는 것에 대해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냐고 물으니,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를 볼 것이고, 열심히 기술을 배워 자격증을 딴 후에는 호주로 가서 기술학교를 다니며 일을 할 예정이며, 기술유학을 위해 영어공부만큼은 열심히 하고 있다네요. 어리지만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만큼은 아주 탄탄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더랍니다. 그녀는 감탄하여 공사가 끝난 후, 그 아버지와 아들에게 진심어린 식사를 대접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많이 배웠다고 말이죠.
그녀는 직장인들이 누구보다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더군요. 자신이 3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만 직장인으로 일하고, 그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사업을 하고 있는 이유는 직장인으로 돈을 벌기도 어렵지만, 스스로 자신의 제대로 된 인생을 만들며 살아갈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를 따라 기술을 배우는 아이가 너무 기특했다는 겁니다. 어차피 공부도 못하고 관심도 거의 없는데 거기에 시간을 쏟을 바에야 빨리 자신이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집중하는게 미래를 위해서도 훨씬 낫다는 거죠.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고 졸업 후 대기업에 취직해봤자 결국 다 똑같은 직장인 아니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습니다. 사실 직장인이란 ‘고용주에 의해 고용된 노예’ 아니겠냐고요...
‘노예’란 단어를 듣자 미국 대학교수인 조안 B. 시울라(Joan B. Siula)가 떠올랐습니다. 노동철학을 연구한 조안 시울라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일의 발견』에서 ‘고용이란 자유와 기회로 이어지게 될 일시적인 노예 상태를 의미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고용인이 된다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해 혹은 다른 목적을 위해 스스로를 자발적 노예로 만드는 것이라 정의하고 있죠. 더 나아가 우리는 고용주에게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 그리고 여러 가지 일을 위한 적합한 조건 들을 돈과의 교환수단으로 활용하여 거래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고용주에게 기꺼이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맡기고 있는 것이며, 그 시간을 돈과 맞바꾸는 것이 바로 직장인의 기본 플롯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돈이라는 고착화된 관계 때문에 시울라는 노동자들을 ‘시간제 노예'라고 주장하는겁니다. 현대 경영의 괴짜라 불리우는 톰 피터스 또한 직장인에 대해 ‘무자비한 조직의 포로’이자 ‘노예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는 집단’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직장인이 자본주의의 꽃인 돈의 위력에 굴복하여 스스로 조직의 포로가 되었으며, 그 생활에 만족함으로써 지속적으로 노예생활을 원하는 존재로 남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직장인인 사람은 없겠죠. 하지만 사회 구성원 중 거의 70%에 이르는 사람들이 직장인으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기술도 능력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돈을 벌기 위한 자발적 피고용인으로 살아가는 것이겠죠. 물론 우리 사회의 교육이 사업이나 기술 그리고 개인 고유의 능력을 키우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기 보다는 그저 직장에 필요한 맞춤형 직장인을 양산하는 쪽으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을겁니다. 하지만 직장에서 제공하는 월급, 이 마약과도 같은 꿀물에 우리의 사고는 점점 경직화되고 닫혀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각자 가슴에 품고 있는 위대한 잠재력 또한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만들어진 그녀와의 만남과 이야기는 제가 내릴 시간이 되어 이쯤에서 마무리 되었습니다. 직장인이 ‘노예’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사업가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나니 마음이 착잡해졌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노예생활을 당장 그만두기는 어려우니 말이죠. 그러나 그녀와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2가지는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가능한 한 노예생활을 빨리 벗어나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만 하겠다는 결심과 더불어 제 아이들만큼은 처음부터 노예가 아닌 본인 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미래 플랜을 세우고 그에 따라 철저한 준비를 하도록 열심히 지원해야겠다는 생각 말이죠. 아, 그리고 참참참! 제가 우연히 만난 그녀는 현재 결혼정보회사인 두리모아의 CEO인 강규남 대표였습니다~늦었지만 이 지면을 빌어 좋은 말씀해주신 강대표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