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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칸양 Oct 14. 2016

당신은 왜 일하는가?
왜 일해야만 하는가?

#3 일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 <일의 발견>


<일의 발견(The Working Life)>


조안 B. 시울라(Will Druant) 지음/안재진 옮김/다우출판사 




1. 책에서 배우다


 1) 일에 대한 질문들


Q1.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을까?

A1. 돈(의식주 해결, 가족 부양, 소비생활 등) 때문에? 어쩔수 없이?


Q2. 우리는 과연 일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을까?

A2. 불행해지지만 않는다면 다행 아닐까?


Q3.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일까?

A3. 결국 나를 위해서라고 말하곤 싶지만...


Q4. 우리는 과연 자유롭게 일하고 있는 것일까?

A4. 업무가 끝나야만 비로소 자유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Q5. 우리는 '주말을 위해' 평일의 시간동안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A5. 두말하면 잔소리.


Q6. 과연 직장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삶을 제공해 줄 수 있을까?

A6. 의미있는 삶은 둘째치고, 가늘고 길게라도 현재의 자리를 유지시켜 준다면 매우 고마울 것이다.


Q7. 우리가 간절히 원해서 시작한 일이 왜 이리 힘들고 어려운 것일까?

A7. 역시나 돈 때문에? 돈의 수급이 끊어질까봐 두렵고 무섭기 때문에?


<일의 발견>의 저자 조안 시울라가 우리에게 던지는 일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 그야말로 간단히 답을 해 보았다. 암울하다. 심히 우울해진다. 사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일이 삶의 보람과 의미를 찾을 수 있음과 동시에 성장, 성숙을 할 수 있으며, 자아발견 나아가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위의 대답과 판이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우리가 받아왔던 교육들은 다 구라다. 교육에서 얘기하는 일에 대한 정의들은 말그대로 이론에 불과하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차갑다 못해 냉혹하기까지 하다. 사실 우리를 가르쳐왔던 교사들 또한 월급쟁이에 불과하며 그들 또한 자본주의의 논리에 지배받으며 살아오고 있다. 물론 걔중에는 교사란 직업에 대해 소명, 천직이라 생각하며 맡은 바 일을 다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숫자가 얼마나 될까? 그들이 참교육에 대해 설파한다 할지라도 비정상적인 교육이 바뀔 수 있을까?


이 책은 우리가 그동안 일에 대해 알고 있던 내용--비록 겉핥기 수준밖에 되진 않지만--을 더 자세하고 구체적이며 심하다 싶을 정도로 파고드는 내용을 담고 있다. 뭐랄까? <일의 발견>이 아니라, <일의 독설>이라고 하면 비슷할까?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 하나. 무섭거나 더러워서 피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계속해서 무섭거나 더러운 것으로 남는다는 사실. 한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위의 질문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의 책임소재가 나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지 말이다.


예를 들어 일을 하는 이유가 단순히 ‘돈’이란 관점에서 벗어나 진정 일의 의미와 보람을 찾기 위해서 스스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진정 내가 바라던 일인지, 앞으로 소명의식과 천직이란 생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만 할 것이다. 만약 스스로 잘못된 길이라 생각된다면,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만 할 것이다. 첫 발은 잘못 디딜 수 있다. 잘못된 선택은 누구나 내릴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 선택을 운명이라 여긴다면, 우리의 삶은 그리고 우리의 일은, 희망이 아니라 짐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일을 희망으로 만들어 갈 것인가, 아니면 짐인채 그냥 어깨를 짓누르게 놓아둘 것인가. 


“중년의 사람들은 더 어려운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야 할 새로운 기회를 맞이한다.”(40P)  


 2) 일의 역사


기원전 2,400년의 그리스 시대.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산(땅과 노예들)을 소유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이 두가지야말로 인간적인 삶의 기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의 일은 그야말로 미천한 노예들이나 하는 것에 불과하였으며, 귀족과 같은 사람들에게 일이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있어 삶은 얼마나 잘 먹고, 놀고, 즐겁게 보낼 수 있는가가 삶의 의미이자 보람이었다.


뒤이은 로마시대 또한 그리스와 유사했으며 중세시대에 들어와서는 교회(카톨릭)가 모든 권력을 부여잡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일은 미천한 계급(백성, 하인, 상인)이 하는 것에 불과했다. 상위계급인 성직자, 귀족들에게 일은 아랫것들이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일은 대물림되었다. 아니 계급(신분)이 대물림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에서 해방될 수 없었다. 악순환은 계속 되었다.


카톨릭의 부정부폐가 심해지자, 유럽전역에서는 새로운 종교를 갈망하는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루터의 루터교, 칼뱅의 개혁파 교회 등이었다. 이들은 교회의 교리를 엄격히 지키며 생활할 것과 몸과 마음이 절대 청결해야함을 강조했으며, 바로 이러한 내용들의 바탕이 된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윤리였다. 이때부터야 비로소 일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일에 대한 생각이 베네딕트 수도회의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라는 규범에서 신교도의 “일하라, 그리고 기도하라”의 개념으로 그 우선순위가 바뀌기까지는 이후 다시 약 1,00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75P) 


루터와 칼뱅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선하고, 일하지 않거나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고 외쳤으며, 더 나아가 칼뱅은 일이 ‘은총의 상징’이자 ‘구원의 수단’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에 뿌리내리게 한 일에 대한 생각은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일과 모든 노동자들을 똑같이 존중하라’고 가르쳤다는 점이다. 일에 관한 한 평등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물론 기득권층의 반발 또한 컸지만.


시간이 흘러 19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터지게 된다. 산업혁명의 위력은 전세계 경제 더 나아가 사상체계까지를 뒤바꿔 놓게 되는데, 먼저 거대산업을 배경으로 한 자본가(부르조아)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자본을 통해 공장을 짓고 싼 임금으로 노동자(프롤레타리아)를 모아 대량으로 공산품을 생산하여 팔기 시작한다. 자본가들은 시쳇말로 돈을 긁어 모으게 되고, 다시 그 돈을 투자하여 새로운 공장을 짓게 된다. 자본가들에게 노동자들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는 굳건해진 상태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가 밑에서 월급(혹은 주급)을 받으며 생활을 하고 있다. 물론 과거의 시대보다 본인 스스로 자본(자기자본이든 타인자본이든)을 모아 사업을 벌일 수 있지만, 그 성공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현대에 와서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라기 보다는 ‘짐’이 되었다. 성공의 가능성은 과거의 계급세계에서와는 달리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 가능성은 그야말로 일말의 작은 것으로 축소되어 있다.


자, 생각해보자. 이러한 암울의 일의 시대. 과연 어떻게 살아야만 의미와 보람을 찾을 수 있을까?  


 3) 우리는 시간제 노예다? 


자본주의는 삶의 수단을 제공할 뿐 삶의 목적을 제공하지는 않는다.(315P) 


평범한 직장인들은 모두 시간제 노예다. 과연 맞는 말일까? 처음 이 책을 읽으며 내게 가장 충격을 주었던 단어다. 노예? 시간제 노예라고? 처음엔 말도 되지 않는 얘기라 치부하며 넘어가려 했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표현만 하지 않을 뿐.


위의 일의 역사에서 보았듯 현대의 자본주의는 더 이상 우리의 편이 아니다. 자본주의란 단어에도 있듯 자본주의는 자본가의 편이다(편들기와 같은 흑백논리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자본주의는 일반 직장인들에게 돈이란 삶의 수단만 쥐어줄 뿐, 삶의 의미와 목적을 주진 않는다. 


고용주들이 유일한 비난의 대상은 아니다. 많은 고용인들이 실제로 게을러졌고, 그들은 고용주들이 자기 삶의 많은 부분들을 책임지도록 기꺼이 내버려두었다.(319P) 


우리가 일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를 대신해서 결정하고 의미를 이야기해 달라고 하는, 특정한 게으름 혹은 주의의 결핍 때문이다.(321P) 


그러나 위의 말처럼 우리에게도 크나큰 책임이 있다. 자본주의의 제일 큰 장점 중의 하나는 어찌되었든 간에 본인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직장을 다니고 있다면, 그 직장도 본인이 입사한 것이고, 그 안에서 어떠한 일을 하고 있다면 그 또한 내가 원해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싫으면 바로 지금이라도 짐을 싸서 떠나면 그만일 뿐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불만만 가득할까?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특정한 게으름, 본인의 삶에 대한 고민의 결핍’ 때문이다. 내 길이 아니라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수십가지의 이유를 댈 수 있다. 딱 거기까지다. 


의미 있는 일은 우리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322P) 


중요한 것은 내 삶은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것이라는 점이다. 일도 마찬가지다. 일을 통해 의미를 발견하고,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것 또한 바로 자기 자신이 해야할 일이다. 회사의 정책이, 규정이 이러쿵 저러쿵 아무리 이야기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고용주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고용주인 것이고, 나는 어디까지나 고용인에 불과한 것이니까. 시간제 노예에 계약한 것이니까.



2. 배운 것 활용하기


 1) 개미, 베짱이, 꿀벌 그리고 개미베짱이


이솝 우화 중에 ‘개미와 베짱이’란 이야기가 있다. 한 여름 열심히 일한 개미와 마냥 놀기만 했던 베짱이가 겨울이 되어서 개미는 따뜻하고 풍요로운 겨울을 보내는 반면, 베짱이는 굶어 죽는다는 슬픈 이야기. 여기에서 미래를 준비할 줄 아는 개미는 똑똑한 존재이지만, 그렇지 못한 베짱이는 결국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는 교훈을 전해주는 이야기이다.


또 다른 이야기를 살펴보자. 이번에는 ‘개미와 꿀벌’ 이야기다. 여전히 개미는 부지런한 존재로 나온다. 하지만 꿀벌 또한 부지런하기는 개미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 아폴로 신은 두 동물의 부지런함을 평하면서 개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은 오직 너 하나 뿐이다. 다른 어떤 생물도 네가 비축한 부의 일부를 공유하지 못한다. 반면 꿀벌은 기특하고 정교한 노력으로 세상에 축복이 되는 것을 만들어낸다.”


자, 여기에 하나 더 동물을 추가해 보자. 실제로는 없지만 개미베짱이란 동물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베짱이가 의미하는 바는 ‘현재 즐기기’이다. 개미는 ‘미래 대비하기’이다. 그렇다면 개미베짱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쯤에서 문제를 하나 내 보자. 우리의 삶, 일에 대한 관점은 개미, 베짱이, 꿀벌 그리고 개미베짱이 중 무엇을 닮아야만 할까?


나는 개인적으로 개미베짱이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개미베짱이 + 꿀벌’이라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사실 불가능한 이론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로서는 개미베짱이의 삶이 제일 좋다고 판단된다. 개미베짱이를 풀어서 말하자면 ‘현재를 즐기며 미래 또한 대비할 수 있는 삶’이다. 아주 흐믓한 삶이다. 현재와 미래까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행복한 삶이지만, 반대로 매우 쉽지 않은 삶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삶을 추구해야 한다. 현재를 희생하여 불확실한 미래만 바라보는 개미와 같은 삶은 절름발이 인생과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미래를 포기한 채 현재의 쾌락만 추구하는 베짱이의 삶 또한 암울한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 개미베짱이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이것이 앞으로의 명제라 생각된다. 아마도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고민해야만 할 사안이 될 것이다.


 2) 돈으로부터의 자유 조절하기 


우리가 실제로 일터에서의 자유를 시장에서의 자유와 교환했다면 통제권을 되찾는 한 가지 방법은 시장에서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우리의 수입 이하로 생활하는 것은 수입을 초과하여 생활하는 것만큼 즐겁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일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 더 많은 융통성을 허락한다.(293P) 


몇 년 전 백수로 지내고 있는 사람의 강의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모두 내용을 다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한가지는 귀에 박힌 내용이 있었다. 최소한의 생활비로 살 수 있다면, 얼마든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무슨 이야기냐면 수입은 거의 없지만 가지고 있는 돈을 최소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만 터득할 수 있다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다른 삶을 꿈꾸고 있었다. 그래서 다니던 직장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만 두었다. 그러나 다른 삶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다소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그 준비기간 동안 다시 다른 직장을 구하는 것을 포기하였고, 대신 가지고 있는 돈의 범위 내에서 생활을 영위하기로 결정했다. 소비를 최소한으로 축소하고, 그것을 습관화하자 정말 작은 돈으로도 생활하는데 큰 문제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엔 많이 힘들고 심적인 고생도 있었지만, 지금은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왜? 내 삶을 쥐고 있던 돈이란 놈의 수중에서 한발 빠져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번쩍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에게 돈의 규모가 소비에 대한 확장적 자유를 준다면, 거꾸로 우리가 소비에 대한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면 돈은 지금처럼 우리를 옥죄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 생활은 생존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낭비적 자유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 조금 불편하고, 조금 여유롭지 못하면 어떤가. 비교대상을 남이 아닌 나 자신에게만 맞춘다면 사실 쪽팔릴게 뭐가 있는가.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지금의 위치(지위)가 무너지면 어떻게 하지? 지금의 안정적인 생활이 무너지면 어떻게 먹고 살지? 백수 강연자의 말처럼 다 먹고 살 수는 있다. 다만 미리 준비하고, 습관화할 수 있다면 상황의 급격한 변화(예를 들어 명퇴같은)에도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 미래에 할 일까지 미리 대비해 놓는다면 즉, 미래에 대한 목표와 계획까지 지금부터 착실하게 마련해 놓는다면 일시적인 충격은 큰 무리없이(또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차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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