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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칸양 Feb 24. 2017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8, 위대한 투쟁가이자 사랑을 노래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지음/박병규 옮김/민음사




1. '저자에 대하여'



●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 7. 12 ∼ 1973. 9. 23)


20세기 가장 대표적 시인 중 한 명. 노벨문학상 수상자. 공산주의자. 민중시인. 그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이제 이 지구상에서 그를 대신할 민중시인은 더 이상 없다. 그가 지녔던 정열, 사랑 그리고 순수는 이제 그의 시 속에서 그리고 칠레 민중, 더 나아가 전세계 민중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 탄생과 유년기


본명은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Neftali Ricardo Reyes Basoalto). 1904년 칠레 파랄 지방에서 철도노동자인 아버지 호세델 카르멘 레예스와 어머니 로사 바소알토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를 낳고 2달 후에 폐병으로 돌아가셨다. 2년 뒤 아버지는 네루다를 데리고 남부의 테무코로 이사하였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트리니다드 칸디아마르베르데와 재혼했으며, 네루다는 그녀를 친어머니처럼 사랑하였다. 뒤에 그는 그 당시를 회고하여 "조국의 개척지인 '머나먼 서부'에서 나는 삶과 대지, 시, 비 속에서 태어났다"고 썼다.


그는 1910년 테무코 남자국민학교에 들어가 1920년 중등과정을 마쳤다. 10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917년 테무코의 일간지 <라마냐나(아침)>에 생애 최초로 「열광과 인고」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한다.  1920년부터는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1946년에는 법적으로 이름을 바꿨다. 12세 때 칠레의 저명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남미 시인 중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미스트랄 역시 이탈리아 시인 가브리엘 다눈치오의 이름을 따 필명으로 삼았다.)을 만나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은 그가 진로를 선택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테무코를 떠나 수도인 산티아고로 갔다. 그의 목표는 사범대학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는 것이었지만, 불문학 공부보다는 창작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네루다는 어깨에 시인의 망토(아버지가 쓰던 철도노동자 망토)를 두르고 챙 넓은 솜브레로 모자를 쓴 차림으로 칠레의 문학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그의 첫 시집은 <황혼의 일기Crepusculario>인데, 이 시집을 통해 그는 앞으로 자신이 앞으로 해 나갈 수많은 시작(詩作)의 세계를 가늠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참여적 경향의 시, 사랑의 시, 자연을 노래한 시, 도시적 분위기의 시 등이 그것이다. 그는 두번째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를 발표하며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칠레 시단의 주목받는 신성이 되었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 평생동안 그의 시와 삶을 관통하게 될 하나의 주제를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그의 사랑은 때로 도발적이었고, 관능적이었으며 고독과 죽음의 주제와 함께 쓸쓸한 애조를 띠고 있다. 네루다는 자신이 그토록 고통스럽게 쓴 시들이 새 시대의 연인들에게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기적에 의해서, 이 고통스럽게 씌어진 책은 수많은 사람들을 행복에 이르는 길로 안내했다"고 말했다. 20세에 단 두 권의 시집을 발표한 그는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되었고, 그는 이후에도 불타는 창작열을 멈추지 않았다.


■ 공직 생활


우리는 예술가가 공직에 나서는 경우를 그다지 좋게 생각할 수 없는 불유쾌한(이 말은 솟아오르는 불쾌한 기억들을 상당히 억누르며 하는 말이다.)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간혹 외국의 작가나 시인들이 공직에 나서는 경우 그것을 의아하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앙드레 말로를 비롯해서 파블로 네루다에 이르기까지 훌륭하게 공직 생활을 해낸 예술가들도 물론 많이 있었다.


네루다는 칠레를 떠나보고 싶어했고, 칠레 외무성은 네루다의 그런 소망을 들어주어 1927년 버마 랭군의 명예영사로 임명받게 된다. 그는 이후 5년 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때 랭군, 콜롬보, 실론, 바타비아, 지금의 자카르타),자바, 싱가포르로 옮겨다녔다.


파블로 네루다의 젊은 시절


그가 아시아에서 영사직을 맡고 있었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화려한 외교관 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명예영사였기 때문에 본국 칠레로부터 지원을 거의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생활은 가난하고 힘든 것이었다. 자바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마리아 하게나르와 첫 결혼을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출신의 아내는 스페인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캘커타에서 열린 '범힌두인 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행들을 회고하는 책들은 감동적이지만 때로는 가슴아픈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당시 그의 생활은 외로웠으며, 버마 처녀 조시 블리스와의 연애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네루다가 랭군을 선택한 것은 스스로 자신을 유배시킨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철저한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그동안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했다. 그가 민중 지향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난해한 시를 쓰는 시인,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자신만의 언어를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1932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로 발령받으며, 그는 다시 라틴 아메리카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당시 이 곳을 방문중이던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친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바르셀로나로, 그뒤에는 마드리드로 전출되어 그곳에서 델리아 델 카릴과 재혼했다.


■ 투사가 되다


그가 스페인 마드리드 영사로 임명되었을 무렵 스페인은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스페인의 대표적 시인이었던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파시스트들에 의해 암살되고, 또 다른 동료 시인 미겔 에르난데스가 내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옥사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1936년 내전의 비극과 파시즘의 광기는 파블로 네루다로 하여금 그간의 나르시시즘적이고 낭만적 정서에 기반한 이기적 시인의 탈을 벗어버리게 만든다. 그는 "세계는 변했고 나의 시도 변했다. 시구 위에 떨어지는 피 한 방울은 그 속에서 숨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 가슴 속의 스페인〉(España en el corazón, 1938)은 내전 중 공화군 전선에서 출판되었다.


당시 스페인 내전과 관련하여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앙드레 말로의 <희망>(1937),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1938), 폴 엘리아르의 <게르니카의 승리>(1938),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 등이 대표적인 작품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이 작품들보다 더 스페인인들에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되었던 작품은 역시 파블로 네루다의 <내 가슴 속의 스페인>이었다.


물론 이 작품이 스페인어로 쓰였기에 더 대중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페인어로 쓰여졌다는 점 외에도 네루다의 시가 공화국파 병사들의 심금을 울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네루다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흐르는 분노와 피눈물을 시에 담았기 때문이다. 다음을 읽어 보라.


와서 거리의 피를 보라,

와서 보라

거리에 뿌려진 피를,

와서 피를 보라

거리에 뿌려진!


그에게 있어 마드리드는 처음으로 문화적 향취를 마음껏 만끽하게 해준 도시였다. 1920,30년대의 스페인은 회화뿐만 아니라 27세대라 불리는 일군의 젊은 시인들이 문화적 부흥기를 선도하고 있었다. 그 향기에 취해 네루다는 ‘꽃의 집’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자신의 집을 예술인들의 사랑방처럼 만들었다. 예술이 꽃피고 시인들로 넘쳐나는 문화의 도시가 파시스트들의 반란으로 파괴되자 네루다는 스페인 국민들 이상으로 상실감을 느꼈다. 더구나 절친했던 시인인 페데리꼬 가르시아 로르까가 내전 초기 암살당하면서 네루다 역시 피눈물을 흘려본 경험이 있던 터였으니 <내 가슴 속의 스페인>은 스페인인의 감성으로 쓴 것이나 다름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직설적이고 신랄한 시어 덕분이었다. 이 시집의 대표적인 시로 꼽히는 <나의 변화를 설명하노라>("Explico algunas cosas”)에서 <자칼도 거들떠도 보지 않을 자칼들/바싹 마른 선인장도 씹다가 뱉어버릴 돌멩이들/독사들도 증오할 독사들>이라고 파시스트들을 정의하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훗날 <모두의 노래>(Canto General, 1950)라는 라틴아메리카 초유의 장편 서사시에서처럼 웅장함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내 가슴 속의 스페인>은 통쾌함을 선사하는 민중시인의 미덕을 이미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내 가슴 속의 스페인>은 출판 역사상 전설로 남았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뭉클한 일화 때문이다. 이 책의 1쇄는 바르셀로나 근처 산 속에 있는 몬세랏 수도원에서 1938년 11월 순조롭게 발간되었다. 그러나 그다지 많은 부수를 찍지는 않아서 이듬해 1월에 또다시 2쇄를 찍어야했다. 하지만 제본을 마치기도 전에 프랑코파 병사들이 수도원으로 들이닥쳐 모든 책을 파기했다. 이 무렵 공화국파의 마지막 보루나 마찬가지인 바로셀로나도 함락될 위기에 처하고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로 탈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화국파 병사들은 경황이 없는 와중에서도 네루다의 시집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리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오르피라는 작은 마을에서 다시 2쇄를 찍기 시작했다.


책을 찍을 종이가 모자랐지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병사들은 붕대와 깃발, 심지어 자신들의 옷가지까지 이용해 기어코 종이를 만들고 책을 찍어냈다. 2년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네루다는 잔잔하게 밀려오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고 이를 평생의 영예로 생각했다. 하지만 <<가슴 속의 스페인>> 2쇄가 출간된 그해 네루다 역시 그들에게 마음의 선물을 한 바 있다. <<분노와 슬픔>>(Las furias y las penas, 1939)이라는 책 서문에 그는 적고 있다. <세상이 바뀌어 나의 시도 바뀌었다. 나는 맹세하노니 이 삶이 다할 때까지 스페인에서 살해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수호할 것이다.>라고.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그의 책을 만들어냈다면, 네루다는 그들을 위해 정의로운 세계를 만드는데 신명을 다 바칠 결심을 한 것이다.


시대적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문학을 위한 문학,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문학보다 더 절박한 현실에 뛰어든다. 그는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으나, 정부는 그를 또다시 멕시코로 보낸다. 이 곳에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시작했으며, 이때 쓴 시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특히 독일군의 맹공격에 맞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려는 영웅적 활약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이 당시 멕시코의 벽화도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43년 태평양 연안의 모든 나라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배를 타고 칠레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 즉시(1945년) 칠레공산당에 입당하고 빈민이 대다수였던 광산촌에서 출마하여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이후 3년 동안 조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학에 바쳤던 것만큼이나 많은 열정을 바쳤다. 그의 공산당 입당은 유년시절부터 자신을 계급적 존재로 인식했던 그인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정치꾼의 욕망때문이거나 권력욕 때문이 아니라 낭만적 유토피아에 대한 시인의 추구 탓이었다. 당시 칠레의 경제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의 폭력적인 이윤 추구와 초석, 동 등 지하자원에만 의존하는 경제구조 탓에 빈곤을 벗어날 수 없었다. 네루다는 이때 대통령 후보로 나선 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가 내세운 공약을 믿었고, 그를 위해 선거운동에 열렬하게 나섰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된 비델라는 그를 지원해준 민중의 의지와는 상반된 정책들을 시행했다. 미국의 의지를 거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네루다는 1947년 비델라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나는 고발한다(Yo acuso)>를 발표한다. 칠레 정부는 공산당을 탄압했고, 당시 5만에 이르는 공산당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망명하고 지하로 잠입한다. 이 무렵 그는 아메리카의 역사와 민중의 삶을 새로 각인하며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다룬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는 <총가요집>을 발표한다. 1949년부터 시작된 그의 망명 생활은 1952년까지 계속된다. 영화 <일 포스티노>는 그가 이탈리아 나폴리에 망명해 있던 1952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가 참여적이고 민중지향적인 시를 썼다고 해서 그가 발표한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것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가 발표하는 시들은 하나하나가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는 것들이었다.


그는 1948년 2월 칠레를 떠나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 남부를 가로질러 4월에 파리에서 열린 평화지지자회의에 참가했다. 또 1949년에는 알렉산드르 푸슈킨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 뒤 유럽의 다른 지역을 돌아보고 다시 멕시코를 방문했다. 1952년 좌익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검거령이 철회되자 칠레로 돌아왔으며 칠레 출신의 마틸데 우루티아와 3번째로 결혼했다. 그는 계속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 네그라에서 살았지만, 1960년 쿠바, 1966년 미국 방문을 비롯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의 시는 거의 모든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 산티아고의 산크리스토발 언덕 기슭에 '라차스코나'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발파라이소에도 '라세바스티아나'라는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은 그가 여행하면서 모은 배의 선수상(船首像)과 그밖의 갖가지 기념물을 진열한 심미적 분위기로 이름난 명소가 되었다.


■ 칠레 민중의 불꽃


1969년 12월 칠레의 진보 세력들은 대중운동연합인 MAPU를 비롯해 사회당, 공산당, 진보당, 사민당이 공동전선을 형성해 1970년 선거에 대비하기로 했다. 이때 공산당 후보가 바로 파블로 네루다였다. 그러나 네루다는 곧 이를 철회하고, 살바도르 아옌데를 인민연합의 대통령 후보로 후보 단일화를 이룩한다.(네루다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후 칠레가 어떻게 변해갔을지 또한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미국의 사주를 받은 칠레의 우파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므로.)


이전까지 노선 대립과 이념 갈등으로 통합되지 않던 진보세력은 인민연합의 기치 아래 하나로 뭉쳤고 결과적으로 선거에 의해 선출된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나중에 살바도르 아옌데와 빅토르 하라편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 미국의 경제 압박으로 인해 칠레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극우반동세력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옌데 정권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칠레 군부는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궁을 공중 폭격하는 등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전복시키고 만다.


파블로 네루다가 노벨 문학상(1971년)을 받은지 불과 2년 뒤의 일이었다.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1973년 9월 11일 이른 아침, 파블로 네루다의 주치의는 시인의 부인 마띨데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시인의 병이 악화도면 안되니 쿠데타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네루다는 이미 라디오를 귀에 끼고 사태의 추이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전까지만 해도 사태의 추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네루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아옌데 대통령이 끝까지 대통령궁을 사수하다 결국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낙담하여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고 말았다.


며칠 후 침대에 누운 채 쿠데타를 비판하는 글을 구술하던 중 창너머로 무장한 군인들이 자신의 바닷가 집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병사들이 가택을 수색하기 위해 오는 것이었다. 부인이 받아 적던 것을 급히 감추자마자 장교 하나가 침실로 들어와 집안 수색하겠다고 통고했다. 네루다는 불쑥 장교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들에게 위험한 것이라고는 이 방에 단 하나밖에 없네." 장교는 깜짝 놀라며 권총에 손을 댔다. "그게 뭡니까?" 네루다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시(詩)라네."


그 후 그의 병세는 위중해져 수도 산티아고의 어느 병원에 이송되었다. 평생의 꿈이 한 순간에 무참히 스러지고 난 시인에게는 더 이상 삶을 부여잡을 기력이 없었다. 곧 혼수상태에 빠져 '그들을 총살하고 있어, 그들을 총살하고 있다고!'라는 말을 되뇌이며 쿠데타의 참혹함에 치를 떨다가 9월 23일 마침내 눈을 감고 말았다.


■ 영원한 청춘의 시인


착취당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낙원을 꿈꾸었고, 그런 낙원을 일구기 위해 노력했던 시인. 그러면서도 시의 품격을 잃지 않았던 위대한 시인은 칠흑같은 암흑의 세게에 갇혀버렸다. 그러나 그의 시는 그 어둠을 밝히는 불꽃이 되었고, 피노체트의 철권 통치 아래서도 그 빛을 잃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장례식에 하나둘 모여들어 수많은 군중을 이루었고, 그의 장례식은 쿠데타 이후 최초의 군중 집회가 되었다. 누군가 앞장서 <인터내셔널>가를 불렀고, 처음의 작은 합창은 커다란 메아리가 되어서 울려 퍼졌다. 지금도 그가 말년에 머물던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의 바닷가 집(네루다는 이 집에 자신과 절친했지만 먼저 떠난 시인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고 한다. 그 중에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뽈 엘뤼아르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은 물론이다.) 에는 추모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낭송하고,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을 맹세하곤 한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시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끊임없이 타올랐고, 칠레 국민들은 결국 군부 독재를 마감시킬 수 있었다. 피노체트는 권력의 정상에서 내려갔고 이 시간 현재 그의 면책특권을 박탈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칠레가 시끄럽다. 그러나 그들 피노체트 일당에게 숨져간 살바도르 아옌데와 빅토르 하라 그리고 파블로 네루다는 지금까지 칠레 국민들을 포함해서 전세계 사람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1908∼1973)


우리에게 매년 5월 18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듯 우리와 반대편에 사는 칠레인들에게도 잊지못할 날이 있다. 바로 9월 11일이다. 비록 이 날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로 말미암아 새롭게 기억되는 날이긴 하지만 이에 앞서 칠레인들에게 이 날은 칠레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쿠데타군의 총격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된 날이기도 하다. 이 날의 기록을 살펴보자.


1973년 9월 11일


잔뜩 찌푸린 하늘의 아침, 라디오에서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는 해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방송을 하였다. 바로 전날인 9월 10일밤 칠레 해군과 미국의 전함들은 공동 작전을 위해 칠레의 발파라이소에 집결해 있었고, 미국은 오래전부터 선거로 선출된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인 아옌데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 오고 있었다. 9월 11일 이 날은 국민들의 재신임투표가 예정되어 있던 날로 아옌데의 개혁정책을 계속 추진하기 위한 국민들의 재신임여부를 묻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의 지지도는 확고하여 승리가 확실히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아침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칠레의 육, 해, 공군과 경찰은 피노체트 육군 최고사령관을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키고야 만다.


잠시 후 쿠데타군은 칠레의 여러 방송국들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고, 아옌데 대통령은 아직 점령당하지 않은 유일한 국영방송 마가야네스 라디오와 전화를 연결, 마지막 대국민 성명을 발표한다.


"이번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곧 마가야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내가 이제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내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나의 희생을 극복해 내리라 믿습니다. 머지 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 행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방송 직후 대통령궁은 경찰과 군 병력, 장갑차, 탱크 등에 의해 완전 포위되었고, 공중에는 칠레 공군 소속의 전폭기들이 선회비행을 하고 있었다. 쿠데타군에서는 대통령에게 해외망명을 허락할테니 항복하라고 최후 통첩을 보냈다. 물론 아옌데 대통령은 그 제외를 거절하였다. 설사 수락하였다 하더라도 쿠데타군은 그를 죽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정오가 되자 대통령궁으로 폭탄이 투하되었고 잠시 후 지상군도 탱크를 앞세워 궁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몇 발의 총성이 들렸다.


쿠데타군의 선봉 돌격대를 따라 들어간 군사평의회 정보국 전직 요원은 미국의 언론인 토마스 하우저에게 "대통령의 유해는 머리가 갈라지고 뇌 속의 것들이 마루와 벽에 튀겨져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쿠데타군은 아옌데가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이날 이후 새로운 칠레에서는 단 일주일여의 기간동안 3만여명의 시민과 인민연합 지지자들이 학살당했고, 이후 사망자 3천여명, 실종 1천여명, 고문 불구자 10만명, 해외 망명 및 국외 추방자가 100만명에 이르게 된다. 당시 칠레 인구는 고작 1,000만명에 불과했다.


과연 미국은 세계 평화의 수호자였던가?




2. 이 책을 읽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작품도 처음이지만, 시인의 자서전도 처음 접해 보았다. 아니 아예, 파블로 네루다란 사람조차도 모르고 살았었다. 미국, 유럽의 유명한 작가들도 잘 모르는 판에 칠레라니... 어쨌든 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역시나 시인의 자서전은 문체도 다르다. 빼어나고 화려한 문장이 곳곳에 자리잡아 탄성을 일으키게 만든다. 다음을 보자.


'그때 발파라이소가 밝아 왔다. 처음에는 짙은 황금빛이더니, 이내 바닷가 오렌지나무로 변하고, 잎이 무성해지고, 그늘을 드리우고, 눈부신 열매를 주렁주렁 맺었다.'(98P)

 → 밤에서 새벽으로의 전환, 탁월한 표현!! 언어는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 은유, 비유, 함축의 언어란!!


읽다보니 의외로 재미있다. 중간중간 재밌는 에피소드를 삽입하여 한번씩 웃음을 짓게 만드는 작가의 역량은 시인이기 이전에 마치 꽁트작가와 같은 느낌도 준다. 내 생각에 이처럼 재미있는 자서전을 쓰는 것도 쉽지 않을 듯 하다. 아마도 천성적으로 배어있는 유머감각이 자서전 또한 위트와 재치로 끌고 가는 듯 하였다. 재밌었던 몇 개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안달루시아 출신의 시인 페드로 가르피아스의 경험담 : 말이 안 통하는 술집주인과의 대화.

"글세,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어. 하지만 그 사람 얘기를 듣고 있으며 다 이해가 되었지. 아니, 그런 느낌어었어. 그 사람도 내 이야기를 틀림없이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다네."(223P)

 → 뭐랄까. 마음이 통하면 언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실은 하나다. 나머지는 곁가지에 불과한 것이다. 삶은 그 진실에 의해 살아지는 것이다. 그 주변에 의해 좌우되면 안된다.


● 멕시코 화가 시케이로스를 칠레로 탈출시킨 일

'이처럼 나는 우리나라 문화(멕시코 감옥에서 탈옥시킨 멕시코 화가 시케이로스가 후에 칠레에 세워진 멕시코 학교에 벽화를 그린 일)에 공헌을 했건만 그 보답으로 칠레 정부는 두 달간 영사 업무를 중지시켰다.'

 →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여. 멕시코인을 그것도 다른 나라에서 탈옥시킬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기는 그 대담함이여. 그리고 '그 보답으로'란 표현을 쓰는 '즐겁고 유쾌한 뻔뻔함'이여!


● 피카소와의 에피소도.

'나 때문에 그리지 못한 걸작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피카소의 황금 같은 시간을 빼앗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285P)

"괜찮은 작품이야."(287P)

 → <열정과 기질>에서 나온 피카소의 개인적 이기주의가 네루다에게는 그의 신분까지 걱정해주는 착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상대적인 문제인가? 그에 따라 네루다도 피카소의 작품활동 시간을 빼앗는 것이 가슴 아프다고 말하고 있다. 암튼 이러한 유명인과의 살아있는 에피소드는 이 자서전을 더욱 빛나게 해주고 있다.


그리고 참으로 더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건 이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 시기가 1972년 전립선암 수술을 받고난 후로써 이미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도 되지 않을 정도로 몸이 성치 않은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비서인 오메로 아르세의 도움을 받아 자서전을 구술로 집필하였으며 그 중간중간에 반짝반짝 빛나는 위트와 유머를 추가하여 더욱 맛깔스러운 자서전을 만든 것이라니 대단하지 않은가!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의 만남, 영화 <일 포스티노>


천성적으로 작가는 항상 자유로움을 갈망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문체나 형식, 어구, 유행, 경향에 관계없이 스스로의 마음 가는 데로 시를 표현하려 애썼던 점이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꼭 해보려 했던 점은 마치 아이의 천진난만함과 호기심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의 호기심, 실험정신은 그를 더욱 적극적으로 만들었다.


그 대표적 예가 아편 경험이다. 만약 아편을 하는데 책에 나오는 것처럼 그런 음침한 소굴에서 아편을 해야만 한다면 영사의 자격으로써 위험하기도 하고 하고 싶지 않을만도 한데, 그래도 시도를 하는 것을 보면 작가의 실험정신엔 포기가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아편에 대해 쓰려면 아편 맛을 먼저 알아야만 한다는 작가의 가치관은 과연 프로 작가다운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아편에 대한 경험을 한 후에 바로 아편 흡입을 끊어버릴 수 있는 그 정신력은 작가가 진정 실험을 위해 아편을 접했음을 더욱 잘 알게 해주는 그러한 행동이었다.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다. 목차를 보면 뚜렷한 공통점은 보이지 않는다. 각 장의 큰 제목 아래로 많은 소제목들이 연결되어 있다. 전체적인 책의 흐름은 중간까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과거와 현재를 왕래하고 있는 점이 보인다. 이런 부분에서 나와 같은 독자는 흐름을 놓치고 결국 길을 잃게 된다. 물론 뒤에 연보가 있지만 자서전 내용 상에는 별도의 연도표기를 하지 않아 시간의 흐름을 자주 놓치게 되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저자는 자서전 후반부로 오면서 앞에서 해왔던 글의 형식과는 달리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 혹은 빠뜨렸던 이야기 위주로 글을 써간다. 그러다보니 독자는 호흡을 잃어 버리고 작가가 이야기하는 대로만 쫓아가기 바쁘게 된다. 특히 후반부의 많은 사람들 개개인의 서술과 평가에 대한 부분은 다소 진이 빠지는 지점이었다. 다소의 아쉬움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저자인 파블로 네루다는 '그들을 총살하고 있어, 그들을 총살하고 있다고!'라는 말을 되뇌이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이념적 투쟁, 특히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쿠데타 군부세력의 무력 앞에 심히 괴로워하며 특히 자신이 정치적으로 믿고 의지했던 아옌데의 죽음 소식에 큰 충격을 받고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죽어서라도 알았을까? 그의 죽음이, 그의 장례행렬이 민중의 첫 시위가 되었다는 점을. 그의 죽음으로 인해 민중들이 지속적이며 결코 꺽이지 않는 항쟁을 시작했음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갈 때마다 2000년은 더욱 가까워진다. 2000년의 종소리, 미래의 기쁨, 내일의 평화, 정의로운 세계를 위해 이 시대의 우리 시인들은 노래하고 투쟁했다.'(398P)





차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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