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칸양 May 18. 2017

아카시아 향 가득한 5월,
작은 추억을 떠올리며

아카시아 향에는 그 시절에 대한 아련함이 담겨있다


얼마 전부터 집 주변으로 아카시아 향이 가득하다. 특히나 조용한 밤에 은은하며 자욱히 퍼져있는 그 향기를 맡노라면 이 땅에 발을 딛고 숨쉬며 살 수 있다는 것에 무한한 기쁨까지 느끼게 된다. 개나리, 산수유, 벚꽃, 진달래, 철쯕까지의 온갖 꽃의 향연이 끝나고 난 후 아스라이 떨어진 꽃잎들 앞에 다소 울적해진 마음을 달래주며 은밀히 찾아오는 아카시아 향기는 5월의 작은 행복이자 삶의 축복이다.


사실 나무의 용도로만 따지면 아카시아는 별 쓸모없는 녀석이다. 소나무처럼 곧게 자라지도 않으며, 전나무처럼 굵지도 못해 땔감말고는 딱히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관점으로 바라본 오만일 뿐, 아카시아가 우리에게 주는 5월의 이 한때의 짧은 시간은 행복한 기억, 추억이자 결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위대한 선물이다.




내 나이 14세 때, 당시 난 고향인 강원도 원주의 까까머리 중학생이었고 자전거로 학교까지 통학을 하고 있었다. 거의 40, 50분 걸리는 거리를 난 매번 고속으로 주파하였고(물론 지각하지 않기위해) 주변의 풍경은 그닥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1년 중 반드시 이맘때 쯤이면 굳이 눈으로 보려 하지 않아도 코를 자극하는 향기가 있었다. 차도 별로 다니지 않는 외곽 변두리 도로의 아침시간, 그 향기는 내게 세상에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듯, 강렬하며 은은한 향기로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특히나 사춘기에 들어서 감수성이 예민해 있던 시절, 아카시아 향은 모나미 볼펜으로 정성껏 쓴 편지 또는 <시네마 천국>의 토토가 고인이 된 알프레도 아저씨를 추억하는 듯한 아스라한 감정을 떠올리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직접적인 추억 하나. 당시 난 전자오락 게임(!)에 미쳐 있었고, 전자 오락실(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은 내 하루 일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방문장소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오락실의 단골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던 중 항상 출근 도장을 찍던 그 오락실에, 어라~ 웬 낯선 젊은 여자 한명이 앉아 있었다. 나이는 20대 초반 정도?(들었을텐데 까먹었다...) 그렇게 미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웃는 얼굴이 활짝 핀 꽃마냥 예뻐 보였다. 


그 누나는 아르바이트생이었고, 지폐를 동전으로 바꿔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처음엔 숫기가 없던 까닭에 갈 때마다 곁눈질로만 바라보다 어느 날 한, 두마디 건너게 되었고, 나중에는 말도 길어지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수준까지 발전하며 친해지게 되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나서는 전자오락을 하러 가는지, 그 누나를 보기 위해 가는건지 다소, 아니 많이 헛갈리긴 했지만, 그 시간은 내게 삶의 휴식같이 달콤한 시간이 되었다.(참고로 난 8살 위의 형 한명만 있기 때문에, 누나란 단어는 내게 거의 ‘여신’처럼 느껴진다)


아카시아 향을 맡으면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 누나가 저절로 떠올려지는 이유는, 그 누나와 한참 친해지던 시기가 아카시아꽃이 만발하던 이맘때쯤이기 때문이다. 아카시아 꽃을 곱게 따서 그 누나에게 선물하자, 그 향기를 맡으며 좋아하던 누나의 미소는 사춘기 소년에겐 큰 기쁨이자 설레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써 사주던 떡볶이는 얼마나 맛있었던가! 


하지만 만남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날 여느때와 같이 찾아간 오락실에 그 누나는 없었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사라진 그녀. 다시 볼 수 있겠지 하며 찾아간 그 오락실에서 그 누나를 다시 볼 수 없었다. 마치 아카시아 꽃이 여름을 재촉하는 비에 홀연히 떨어져 사라지듯 그렇게 그녀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6년 전의 일이다. 참 웃기지 않은가? 그리고 대단하지 않은가? 강렬한 연애를 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몇 달의 만남, 그저 이야기를 나눈 수준 뿐임에도 아직 그 느낌이 전달되어 온다는 것이. 그때부터 무려 36번째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고 있다. 시간은 흐르고, 나이는 먹으며, 내 인생은 청춘을 지나 어느덧 성숙기를 향해 치닫고 있다. 


그러나 아카시아 향이 과거의 나를, 내 기억을 되살려 줌에 따라 현재의 내게 작은 기쁨, 즐거움을 선사해주고 있다. 다시한번 내가 이 땅에 아직도 발을 딛고 살고 있으며, 온전히 숨 쉬며 이 향을 맡고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래서 삶은 고맙고, 즐겁고, 행복하다.





차칸양

Mail : bang1999@daum.net

Cafe : 에코라이후(http://cafe.naver.com/ecolifuu) - 경제/인문 공부, 독서 모임




※ 공지사항 한가지!

차칸양이 진행하는 '좋은 책 읽고 쓰기 습관화 프로그램' <에코독서방> 5기를 5월 29일(월)까지 모집하고 있습니다. <에코독서방>은 첫째, 좋은 책을 읽고, 둘째, 반드시 독후감을 작성하며, 셋째, 정기적인 독서 습관을 키우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6개월 간(6월~11월) 6권의 자유도서와 6권의 공통도서를 읽게 되며, 월 1회의 오프모임을 통해 사회에서는 만들기 힘든 형/누나/동생의 관계까지 얻게 되는 특전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한번 하게 되면 푹~ 빠지게 되는 에코독서방의 매력,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https://brunch.co.kr/@bang1999/230



매거진의 이전글 산 너머 강촌에는, 자전거길이 참 좋더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