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칸양 Aug 21. 2019

'살아남는다'는 것

#59,  누구의 길도 아닌 자신만의 길을 걸어보자


지난 주였다


출장을 마치고 인천 공항에서 서울로 가던 중 사촌 동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침울한 목소리로 여동생이 좀 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달포 전, 병 문안 했을 때 동생은 이미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암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거의 빠졌고 몇 개월간의 투병으로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말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 곱고 예쁜 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닐 때 세 살 위 사촌오빠인 나를 친오빠보다 더 따랐던 동생이었다. 운명이 기구한지 세 번의 결혼으로 인생의 아픔과 슬픔을 겪기도 했다. “오빠, 사는 게 힘들어 자주 만나지도 못했네.“라고 내게 말을 하며 나와 내 아들의 근황을 물어보았다. 당시 구 개월 넘는 실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터였다. 동생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한 것 같았다. 


동생은 죽기 전, 첫 결혼에서 낳은 아들과 딸을 꼭 한번 만나보고 싶어했다. 20여년 전에 헤어져 몇 년 전 멀리서 장성한 아들을 본 것이 전부였다고 했다. 자식을 버리고 나간 엄마를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장례식장에 가서 알았다. 죽기 며칠 전 생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몽매에도 그리던 아들과 딸을 만나기 위해 정신을 놓지 않고 단말마적인 고통을 견디었다고. 살아있어야 했었을 것이다. 자식한테 미안하다는 그 한마디 말을 해야 했기에. 결국 동생은 자식을 만났다. 살아남아 자식을 만나야 한다는 초인적인 의지가 그녀의 생명을 며칠 연장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안 되어 운명을 달리했다. 이승의 삶에서 마음에 맺힌 회한과 응어리를 조금은 덜어내고 갔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살아남기'에 담긴 의미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누군가 왜 사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답을 할까. 그냥 태어났으니 열심히 살다 죽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뻔한 답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남녀간 욕정의 산물로 태어났든 사랑의 결실로 태어났든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것도 그냥 주어진 팔자대로 살다가 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소극적인 답변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예측하기 어렵고 불확실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때로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기만 하다. 불완전한 인간의 중대한 실수,탐욕, 그리고 어리석음이 많은 사람의 삶을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전쟁과 내란은 말할 것도 없고 자동차, 버스, 여객선, 기차, 비행기 등의 운송 수단을 이용할 시 우리의 목숨은 그것을 조종하는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 길을 걷다 차가 갑자기 보도를 넘어와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의 주어진 운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 운명에 무기력해 지기도 한다. 프랑스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는 자크 아탈리는 이러한 운명 앞에 굴복하는 인간의 행동유형은 자포자기, 속세이탈, 회개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고 끝내는 자살을 택하든가 때로는 극단적 이기주의자 또는 금욕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지난 구 개월의 실직 기간이 길어질수록 수많은 상념이 마음에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남은 인생을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독서와 글쓰기에 몰입을 할까?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속세를 잠시 떠나 산사로 들어가 볼까? 막노동이라도 해볼까? 아니면 퇴직 전에 몸 담았던 업종에 다시 발을 들여볼까? 등등.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힘든 시기에 그 누구도 내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실직은 당사자인 내게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지만 타인에게는 사소한 남의 일이었다. 가까운 가족도 힘들어 하는 나를 바라만 볼 뿐 삶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때로는 무기력해지는 내 모습에 실망하기도 했다.


국가, 민족, 기업의 질긴 생명력은 수많은 성상의 세월을 거쳐 살아 남아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흥망성쇠의 위기를 겪고 꿋꿋하게 생존해 있는 민족과 기업은 높이 평가할만 하다. 한 개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직장에서 승진은 하지 못하더라도 정년 퇴직까지 살아남는 사람, 스타가 아니라 대중의 인지도는 떨어지더라도 나이 40 넘어 현역으로 뛰는 운동선수들은 살아남기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살아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과 유혹이 있었을 것 인가.


운명에 순응하는 인생은 너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삶이다. 우리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삶’이라는 거친 세상에 내 던져졌다. 도전과 용기, 과감한 혁신을 통해 삶의 파고를 헤쳐나가야 한다. 아탈리는 살아남기란 모든 생명체의 가장 으뜸가는 목표라고 한다. ‘살아남기’라는 말에는 자신에 대한 사랑, 생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열정, 절제, 변화, 적응, 혁신 등의 처절함이 묻어난다. 이것으로 무장하지 않고는 자신을 둘러싼 외부적. 내부적 환경에 너무 쉽게 굴복 당한다. 매 순간위기와 기회가 공존한다. 끝까지 살아남아 남은 삶의 승리자가 되어 홀로 우뚝 서 보자.



                                                                            2013년 11월 18일


                                                           -- 최재용(변화경영연구소 9기 연구원) --



* 변화경영연구소의 필진들이 쓰고 있는 마음편지를 메일로 받아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해 주세요.




운명(運命).


'운명'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어만 보면 운명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숙명적으로 안고 가거나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런 의미로 다가옵니다.


맞나요? 운명은 그런 것일까요? 하지만 인간의 삶을 둘러보면 그런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생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혹자는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 재밌는 것이라 말하지요. 만약 인생이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열심히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할 것입니다. 저는 시간이 갈수록 인생은 과정이자 방향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합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맞기 전 살아있는 동안 무엇을 하며,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살아 가느냐가 중요할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가는 길이 명확하다면, 아니 최소한 방향이라도 맞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 길은 아무리 힘들어도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소 설사 그 길에서 죽음을 맞게 되더라도 후회는 없을 것입니다. 큰 업적을 남기면 위인으로 기억되겠지만, 그렇지 못한다 한들 뭐가 아쉬울까요. 내가 가고자 하는 그 길 위에서 마지막을 맞을 수 있다면 말이죠.


운명을 뛰어 넘어, 혹은 운명일지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자신의 길을 찾아 꾸준히 걸어갈 수 있는 나의 시간을 연출해 낼 수 있는 힘. 그 장면들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현실의 하루하루를 잘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차칸양

"경제·경영·인문적 삶의 균형을 잡아드립니다"

- 재무 컨설팅, 강의 및 칼럼 기고 문의 : bang1999@daum.net

- 차칸양 아지트 : 에코라이후(http://cafe.naver.com/ecolifuu) - - 목마른 어른들의 배움&놀이터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