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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칸양 Jul 18. 2019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58, 실패로 끝난 사랑 앞에서, 다시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선볼래?”


“응?”

“아니. 네가 혼자라니까 누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


이어지는 엄마의 이야기를 듣다가 울음을 터뜨릴 뻔 했습니다. 무서웠거든요.


딸이 혼자라니까 엄마의 지인분이 누군가를 소개시켜 주겠다했던 모양입니다. 엄마는 조심스럽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어갔어요. 남자는 나이가 어떻고, 어디서 뭘 하는 사람이라더라. 아이들은 몇 살이고 성별은 뭐라더라. 부인이랑은 이러저러해서 혼자가 되었다더라. 그러면서 마지막에 “그냥 누가 말을 해서 나도 전해보는 거야.” 라는 말을 덧붙이는, 도망갈 구멍을 잊지 않으셨어요. 나는 대답을 해드렸어요.


“살림도 못하는 딸 보내놓고 잠은 오겠어? 아직은 결혼 생각 없네요.”



두 번째 사랑의 기회


그 사람의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나에겐 과분한 조건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선을 본다는 것이 싫었던 것도 아닙니다. 선이야 볼 수도 있는 거지요. 내가 무서웠던 건 나는 나에게 사랑의 기회가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아이 아빠와 살았든, 살지 않았든 중요한 것은  하나였어요. 내게 아이가 있다는 것. 둘이 헤어져 남은 하나는 다시 사랑이 찾아오리라는 기대를 할 수 있지만, 셋이 헤어져 남은 둘은 기대를 해도 되는지를 물어야 하니까요. 나를 다시 떨리게 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나는 “네가 좋아.” 라는 말 대신에 떠듬떠듬 “내가 좋아해도 되나요?”를 물어야겠지요. 세상에 태어나기 전, 사람에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랑 기회권’이 주어지는 거라면 나의 마지막 티켓은 아이 아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자가 된 후부터 나의 오빠는 끊임없이 결혼하라는 소리를 하곤 했어요. 난 항상 알겠다고 대답을 하곤 했는데(실제로 난 결혼이 끔찍하다거나 남자라면 지긋지긋하다는 건 아니니까요) 이런 식의 결혼이라면 자신이 없어지네요. 남녀가 만나서 매일 싸우더라도 끔찍한 이 사람을 사랑한다며 하는 것이 결혼인데, 나는 사랑해도 되는 사람인가를 먼저 따져보아야 한다는 거잖아요.


사랑의 자격 미달. 이것이 나에게 붙여졌던 이름입니다. 무서웠습니다. 다시 사랑하고 싶은데, 나는 실패자라며 내게 맞는 사람이나 고르라는 말을 듣는 듯 했거든요.


나에겐 아직 남은 사랑이 있는데 상대방이 떠나갈 때 혹은 나이가 들어 이제는 대충 골라가라며 핀잔을 들을 때 우리는 이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혹은 나쁜 사람만 만났을 때도 그럴 수 있겠군요. 나처럼 우연찮은 상황에 혼자 남겨진 싱글들도 있겠고, 어이없는 사랑의 상실에도 이런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제 안 돼. 나는 항상 이럴 걸. 이제는 타협이 필요할 때야.' 은연중에 말을 합니다. 하지만 사랑에 타협이 있던가요.



진정한 사랑에는 '훈련'이 필요하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활동의 경우라면 사람들은 열심히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려 하고 개선법을 찾아내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이 활동을 포기할 것이다. 사랑의 경우, 포기는 불가능하므로,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인 것 같다. 곧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프롬은 평탄한 사랑을 하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약혼녀를 죽마고우에게 빼앗기기도 했고, 정신 분석 치료를 받다 자신의 의사와 결혼하기도 했지요. 사랑에서 방황하던 프롬은 헤니 구어란트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 헤니는 원인이 불분명한 병을 앓게 되는데 프롬은 그녀를 위해 모든 일정을 취소한 채 곁에 머뭅니다.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헤니를 보며 프롬은 실의에 빠지지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도 바뀌지 않았던 상실 앞에서 아마 그는 좌절을 경험한 듯합니다. 몇 달 후 프롬은 애니스 프리만을 만나게 되는데 이때 <사랑의 기술>이 탄생합니다. 좌절기의 프롬을 이끌어 낸 것은 애니스였던 거죠. 그녀를 만나 그는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었던 거겠죠.


프롬은 사랑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요. 이거였어요. 사람이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먼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나에게 부족한 것을 그대가 메꿔주기에 별 수 없이 사랑하는 척하는 것이 아닌, 혼자서도 살 수 있는 내가, 사랑의 이름으로 그대와 함께하는 불편을 감수하겠다 하는 거지요. 때론 나를 깎으며. 때론 나를 전진시키며.


프롬은 친절하게 실천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3가지가 필요 하지요. 훈련, 정신집중, 인내가 그것입니다. 간단하게 생각해 볼까요? 복잡한 건 질색이니까요.


사랑이 맹목적인 자기애를 위한 찬사를 원하는 것이 아닌, 유아기에 부족함을 느꼈던 사랑에 대한 충족을 원하는 것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써 서로에게 진실한 애정을 갖고 사랑 안에서 안정감과 충만함, 나아감을 얻기 위해서는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 프롬의 말입니다. 단지 즐거운 감정과 쾌락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을 대하는 것에 훈련이 필요하며, 기술을 훈련하기 위해서 정신을 집중해야 하고, 사랑의 달성을 위해서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실패로 끝난 사랑 앞에서, 다시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는 훈련을 해보기로 했어요. 어찌되었든 내가 사랑이라 믿었던 것은 실패로 끝이 났으니까요.


차 안에서 제 딸 하니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하니 사랑해.” 하니가 대답했어요. “응.”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사랑해.” 아무 말이 없었어요. 못 들은 척하셨거든요.

아빠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사랑해.” “어.. 뭐..” 당황하신 거였어요.


나는 깔깔대며 웃었어요. 우리 식구들 모습이 웃겼어요. 티비, 영화, 책, 길거리에서도 흔해진 사랑한다는 말 앞에서 이렇게 서툰 모습이라니요. 내가 이런 사람들이랑 살고 있었군요.


누군가는 나에게 배부른 사랑노래 따위라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계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의지로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겠어.’ 이렇게 마음먹는 순간에 사랑에 빠질 수 있다면 우리는 고민도 할 필요도 없겠지요. 반대로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어.’ 마음먹어도 사랑에 빠지는 우리들입니다.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상처를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새로운 설렘에 가슴 졸이지 않나요. 사랑. 하루는 천국으로 하루는 지옥으로 우리를 이끄는 포기할 수 없는 감정. 포기하지 못하는 감정. 마음대로 되지 않는 감정. 그만 둘 수 있을까요?


이탈리아 베로나에 있는 줄리엣의 집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합니다. 벽에는 온갖 낙서와 사랑을 기원하는 메모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지요. 줄리엣이 “로미오. 왜 그대 이름은 로미오인가요.”를 읊조렸다는 발코니에는 여러 나라 말로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에 발을 딛을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지경입니다. 두 개의 시선이 부딪힌 짧은 순간 서로를 알아보았다는 로미오와 줄리엣. 두려움 없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단 3일 만에 로미오는 죽음의 물약을 마시고, 줄리엣은 자신의 가슴에 단검을 꼽습니다. 잔인한 듯 보이는 운명의 장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줄리엣의 집을 찾아 사랑을 찾아오길 기원하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진정한 사랑이기를 바랍니다. 나 역시 나만의 로미오를 찾습니다.


‘사랑해’ 라 말하는 것은 프롬이 말하는 훈련입니다. 언제 어느 순간 나를 스쳐지나갈지 모르는 나의 운명, 나의 로미오에게 두려움 없이 사랑을 표현하는 줄리엣이 되기 위해 나는 연습을 합니다. 그가 나의 곁에 있을 때 이런저런 재는 마음으로, 한없는 두려움으로 우물쭈물 하며 뒷모습을 바라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라도 어린 시절 ‘누가 뭐래도 나는 네가 좋아.’를 말했던 객기로라도 마음을 표현해 이뤄지지 않더라도 후회 없기를 바랍니다. 그는 나를 받아들이기 위해 용기를 내야 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상황에도 ‘사랑해’라 말하는 나도 용기를 낸 것입니다. 내가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 마음먹으며 다가간 순간 그도 나를 보며 그리 생각할 것임을 나는 믿습니다. 아니, 믿기 위해 연습합니다.


실패로 끝난 사랑 앞에서 다시 사랑의 노래를 불러 봐요. 실의에 빠져 있는 나의 곁을 지나는 로미오를 위해 훈련을 하기로 해요. 하나의 사랑이 끝나도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게 우리들이니까요. 그런 존재는 동화 속에만 있고 현실에는 없다고요? 당연하죠. 단 한 사람이니까요. 한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면 기다림의 지긋지긋함을 훈련의 부지런한 준비로 바꿔요. 어쩌면 당신에게 아픔을 주었던 그 사람이 훈련일지도 모르겠군요. 내가 사랑하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말해보세요.


“사랑해”



                                                                             2012년 4월 18일


                                                              -- 이루미(변화경영연구소 7기 연구원) --



* 변화경영연구소의 필진들이 쓰고 있는 마음편지를 메일로 받아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해 주세요.




사실 변화경영연구소의 '후배' 연구원이긴 하지만, 이루미 연구원하고는 거의 말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같은 용인,  그것도 가까운 근거리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스레 말을 할 기회도 없었네요(제가 용기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긴 하지만요). 어쩌면 그녀가 홀로 된 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나서 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요 며칠 전 마트에 갔다가 우연히 그녀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전 모습 그대로더군요. 잘 살고 있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여전히 말을 붙여보진 못했습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살짝 지켜본 정도였지요.


그때의 기억이 그녀의 글을 선택한 이유일 거라 생각합니다. 날짜를 보니 지금으로부터 7년 전 글이네요. 7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녀는 다시 사랑하고 있을까요? 사랑의 실패를 넘어서서, 에리히 프롬이 말한 사랑의 훈련을 거쳐,  다시 예쁜 사랑을 하고 있을까요? 


분명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글에서도 다시 사랑을 하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이 확연히 느껴지고 있으니까요. 만약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고, 지금 그 사랑을 느끼고 만족하며 더욱 키우는 중이라면, 이번에는 아주 오랫동안, 생이 끝나는 시간까지 그 효력이 지속되길 바랍니다. 어차피 인생에 사람과의 사랑을 빼고 나면 남는건 없으니까요.


7년 전 그녀의 글에 남겨진 댓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2013년 소천하신 구본형 선생님의 댓글이네요. 


"루미의 글이  체리같다. 

남산에  벚꽃 흐드러져 꽃비 내리더라. 

너에게 올해는 참 좋은 해가 되리라.

너는 체리 꽃 아래 사랑스러운 여인이 될 것이다."




차칸양

"경제·경영·인문적 삶의 균형을 잡아드립니다"

- 재무 컨설팅, 강의 및 칼럼 기고 문의 : bang1999@daum.net

- 차칸양 아지트 : 에코라이후(http://cafe.naver.com/ecolifuu) - - 목마른 어른들의 배움&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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