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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칸양 Jul 05. 2019

핫케익뎐

#57, 음식의 추억, 그 잊지 못할 순간에 대한 그리움 


탑을 쌓는다.

다보탑을 조각하는 심정으로, 휘영청 달 밝은 밤 탑돌이를 하는 심정으로, 핫케익을 한 장씩 구워 쌓아 올린다. 식구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새벽빛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방안에 눈을 비벼가며 쳐다본 시계는 어이없게도 9시 43분. 나의 혈족들은 임상적으로 유전적으로 확인된 저혈압으로, 대를 이어 차도가 없는 아침 회피 증후군을 앓고 있다. 그러므로 아침 일찍 출근, 아침 일찍 등교가 나의 천성에 어긋나는 행위로써 평생 익숙해지지 않는 고행이었음은 두말함 잔소리다. 그러나 먹고살아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과제는 이런 인간적인 본능마저 왜곡시켜 새벽밥을 하고 밤새워 사골국을 끓이고 급한 PT를 준비한답시고 새벽 기상을 하는 인간 개조를 감행하게 했다. 그리하여 나는 온 식구가 10시에 부스스 일어나는 친정집에 와서도 어쩌지 못하고 너무 일찍, 무려 7시 58분에 일어나 블라인드 친 시꺼먼 방안에 애처로운 램프 하나를 밝히고 책을 들여다보다가, 간신히 남은 분량을 해치우고 결연히 일어나 식탁으로 향한다.


일어나면 졸리다. 졸리면 책을 읽는다. 책을 읽다 보면 다시 졸린다. 책갈피를 끼우고 욕실로 가 치카를 하고 머리를 감는다. 머리까지 감고 나면 도저히 다시 이부자리로 파고들지는 못할 것이다. 젖은 머리를 이고 지고 가서 냉장고를 뒤진다. 오늘 아침은 며칠 째 새벽잠을 설치는 엄마 대신 아침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버터 입맛 아버지가 좋아라 하는 핫케익 믹스가 조리대 한구석에 뒹구는 걸 어제 봐 두었다. 둥근 플라스틱 그릇에 계란 한 알을 깨어 넣고 거품기로 휘젓는다.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리드미컬한 동작으로 재빨리 거품을 만들어내야 푹신하게 부푼 먹음직한 핫케익을 완성할 수 있다. 거품이 잔뜩 일어난 계란물에 핫케익 가루를 넣고 우유를 섞어 걸쭉한 반죽을 만들어야 하건만 노인 두 양반이 사는 집의 냉장고에는 우유가 없다. 에라 모르겠다. 유통기한이 언제 지났는지 모를 생크림 요거트를 한 통 붓고 물을 넣어 반죽을 완성한다. 약한 불에 덥혀둔 프라이팬에 나직한 치직 소리가 정겹게 울려 퍼진다. 농도 짙은 반죽이 달궈진 팬과 뜨겁게 만나 갈색의 바삭한 표면으로 경계를 짓고 둥그런 핫케익의 모양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본다. 핫케익, 양인(洋人)들은 본래 팬케익이라 부른다는 이것은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빵이었고, 국수라는 변화무쌍한 음식의 먼 조상이었다.


마리 앙뜨와네뜨가 정말 그 진원지인지는 알 수 없으나,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으라 했다던가? 그 유명한 문구가 주는 착각이 있다. 빵이 먼저인가? 케익이 먼저인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화려하고 달콤한 케익의 외관이 주는 착각은 이것이 빵보다 기원에 있어서, 그 중요성에 있어서 앞설 수 없다는 것이다. 럭셔리한 그녀의 자태!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케익의 조리법은 빵의 그것보다 단순하다. 곡물로 만든 걸쭉한 죽을 팬에 구워 익혀내는 것. 이 기본적인 케익의 조리법은 치대고 기다리고 숙성시키는 훨씬 더 발전된 화학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빵의 조리법보다 시대적으로 앞서고, 근원적이다.


'먹거리의 역사'나 '빵의 역사'와 같은 책을 뒤지다 보면, 곡물의 생산과 그 조리법의 변천이 인류에 미친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영향이 어마 무지하다는 데 감탄하게 된다. 인류 문명의 시작과 발전은 더 많은 음식을 확보하고 더 풍족한 식생활을 누리기 위한 몸부림이자 생존의 조건인 섭식을 유희로 승화시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팬케익은, 곡물을 재배하여 그것을 단순히 불에 구워 익혀먹는 과정에서 두발 짝, 물에 넣고 끓여 죽을 만들어 먹는 과정에서 딱 한발 짝 더 나아간 단계다. 걸쭉하고 된 죽이 어느 날 불에 달군 돌에 쏟아져 눌어붙어 익은 것을 버리지 않고 맛본 누군가가, 케이크의 발견자, 아니 발명자다. 그 걸쭉한 죽 또는 반죽이 밀가루 같은 곡물이든, 고기든, 야채를 섞은 것이든 상관은 없다. 비싼 양요리(洋料理) 중 크랩 케익이란 것은 게살을 발라내 이런저런 향신료와 섞어 부침개처럼 두텁게 지져낸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아마도 지금도 러시아의 일부 지역에서는 서민의 곡식, 메밀로 만든 팬케이크를 빵 대신 주식으로 먹어 왔다. 우리 버전의 팬케익은 부침개, 전, 부꾸미 계열일 거다. 밀가루에 대충 부추와 당근 같은 야채를 썰어 넣고 기름에 부쳐내거나, 녹두를 어렵게 까불려 갈아낸 반죽에 고기와 김치와 고사리와 각종 좋은 것을 올려 녹두전을 부쳐먹거나, 찹쌀을 둥글게 반죽해 꽃 한 송이를 따다 얹고는 지그시 눌러 기름에 부쳐낸 ‘꽃다운’ 화전을 먹었다.


이 유서 깊은 팬케익의 기원과 그들의 맛난 친척을 생각하며 나는 오늘 아침 핫케익을 굽는다. 핫케익은 반죽을 만드는 데는 오 분도 안 걸리지만, 약한 불에 천천히 익혀야만 하는 과정 때문에 시간이 제법 걸리는 메뉴다. 막 구워낸 핫케익의 달콤한 냄새와 메이플 시럽의 달디단 향이 방 안을 채우자 아버지는 일어난다. 무슨 맛있는 냄새가 난다야. 이제 막 깨어난 아버지와, 오래간만에 단잠을 자고 난 엄마가 아이고, 오늘은 이걸로 아침 해결이라며 반색을 하는 사이, 핫케익 탑은 완성되어 수북이 쌓였다. 접시에 하나씩 덜어 시럽을 뿌려 한 접시씩 차지하고 실은 매우 원시적인 서양식 아침을 맛본다. 매일매일 아침마다 밥을 하고 국을 끓이느라 힘들었던 엄마는 딸내미가 차린 아침이 몹시 흡족한 눈치다. 초딩입맛 아버지는 핫케익이 맛나다며 단 시럽에 핫케익 두 장을 금세 해치웠다. 여기에 계란 프라이와 삶은 소시지를 곁들여 아이들까지 순식간에 아침이 해결됐다. 아, 고마운 녀석. 나는 오늘 할 효도와 명상을 핫케익으로 다했다. 골드버그의 뼛 속까지 쓰라는 충고를 가슴 깊이 새기고 나는 위장 가득 핫케익의 의미를 채운다. 감사하다, 너 핫케익이여!



                                                                           2015년 1월 5일


                                                              -- 강종희(변화경영연구소 10기 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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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희 연구원은 <어어없게도, 국수>의 저자입니다. 그녀는 음식 책, 그것도 국수에 대한 이야기로 첫 책을 출간했습니다. 왜 하필 국수일까? 그녀는 스스로를 표현하길 이렇게 말합니다.


"냉면의 고향 평안도 출신 조모와 그 유전자를 이어받은 부친 덕분에 ‘혈관 속에 냉면 육수가 흐르는’ 뼛속까지 진정한 모태 면식수행자"


이 모태 면식수행자는 '국수가 있는 곳이라면 세상 어느 곳이라도 수행의 장소로 삼으며 하루 한 끼는 반드시 국수를 먹는 투철한 면식 수행의 길을 걸어'왔고, '고단한 삶의 위안으로 좋은 사람과 국수 먹기의 임상적, 심리적 효과를 홀연히 깨닫고 국수로 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책 <어이없게도 국수>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죠.


“국수로 추억하고, 국수로 철학하고, 국수로 위로받는 면식수행자의 인생 처방전!”


그녀는 말합니다. 식욕은 삶의 의지이고, 미래에 대한 기대라고요. 또한 뭔가를 먹는다는 것은 찰나를 가장 깊숙하게 즐기는 원초적인 경험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삶의 어떤 순간에나 존재하는 음식의 추억은, 그 사람의 소소한 일상에서 나아가 한 일생을 담아낼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기억의 창고라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아이를 키우는 혹은 키웠던 부모라면 핫케익 만든 경험이 없는 분은 거의 없을 겁니다. 핫케익은 아이들을 위한 최고의 간식이라 할 수 있죠. 시럽까지 듬뿍 뿌려 놓은 사진 이미지는 얼마나 달콤해 보이나요? (주르륵...) 강종희 연구원의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음식에 대한 추억은 삶을 살아가는 그 어떤 기억 못지않게 강렬하다고 말이죠. 특히나 좋은 사람과 함께 했던 음식과 얽힌 추억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 생의 한 순간으로 남을 겁니다. 핫케익하면 아이들의 어린 시절, 그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죠.


아, 비록 아이들은 커서 성인이 되었지만, 이번 주말에는 굴러다니는 핫케익 가루를 찾아 맛깔스러운 핫케익을 만들어 먹어야겠습니다. 때마침 군대 간 아들도 외박 나온다고 하니 말이죠.^^





차칸양

"경제·경영·인문적 삶의 균형을 잡아드립니다"

- 재무 컨설팅, 강의 및 칼럼 기고 문의 : bang1999@daum.net

- 차칸양 아지트 : 에코라이후(http://cafe.naver.com/ecolifuu) - - 목마른 어른들의 배움&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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