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칸양 Jan 06. 2020

당신은 알에서 나오려 투쟁하고 있는가?

내면의 성장을 위한 되새김 <데미안>을 읽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알은 세계다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새는 신에게 날아간다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마도 고등학교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 같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히 읽었음을 기억하는 건 위의 문장 때문이다. 이 문장이 주는 강렬함이 이 소설 <데미안>을 잊히지 않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정확히 그 의미를 이해하진 못한 듯싶다. 왠지 멋지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


그리고 무려 30년이란 시간을 건너뛰어 이 책을 다시 손에 들었다. 찬찬히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내용도 있었고, 마치 처음 읽는 듯 생소한 구절도 있었다. 점점 책에 빠져 들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내가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맞다. 30년이란 시간이 나의 외모와 생각을 변하게도 만들었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내가 많이 성장했다는 것이다.



성장이란 나의 영향력을 넓혀가는 것


나이를 먹는다고, 오래 산다고 해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장은 영혼의 성숙됨을 의미한다. 곧 죽을 때가 가까워 왔음에도 오히려 어린아이보다 못한 노인들을 종종 본다. 아집과 편견으로 똘똘 뭉친 그들은 융통성과 유연성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배려의 공간이 없다. 그들의 세계는 편협함과 동시에 쓸모없는 단단함으로만 무장되어 있다. 시간만, 세월만 보냈을 뿐 결코 성장하지 못한 그들의 모습은 아쉬움 속에 머문다.


성장을 제대로 정의하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성장이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의 범위가 확장되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다. 그렇다면 영향력이란 무엇일까? 원으로 표현해보자.



위의 그림처럼 이 세상엔 ‘나’란 존재가 있다. ‘나’는 세상 무엇보다 가장 소중하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란 존재가 사라지면 세상 또한 신기루처럼 없어지고 마니까. ‘나’란 존재가 있으므로 이 세상엔 여러 관계가 생겨나고 형성된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위의 도식은 나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이자 순서이기도 하지만, 관심도와 중요성에 따른 배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의 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둘러싸고 있는 것은 배우자의 원이다. 이는 ‘나’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이 바로 ‘배우자’란 의미다. 생각해 보자. 내가 죽을 때가 다가와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할 때 나를 지켜봐 주고 돌봐줄 사람은 누구일까? 자식? 친구? 직장동료? 후배? 모두 아니다. 오롯이 배우자의 몫이다. 배우자를 인생의 동반자라고 한다. 동반자란 인생이라는 긴 여행을 옆에서 함께 걷는 사람을 말한다. 그만큼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자와의 이별, 특히나 사별은 나의 원까지 줄어드는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다음으로 자녀, 부모, 친척, 친구, 선, 후배, 직장동료, 사회 친구, 타인의 순으로 영향력의 원은 확장된다. 여기서 성장이란 나의 원이 커짐으로써 주위에 있는 관계의 원에 그 영향을 더 미치게 됨과 동시에, 그 관계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관심과 배려로써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나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선한 영향력’이라고 부른다. 성장은 나의 생각과 관점이 더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이다. 그로 인해 여러 관계를 포용하고 너그러이 바라보며 챙길 수 있는 여유와 깊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은 어디인가


아주 오래된 옛이야기가 대부분 진실일 수 있지만 그 진실들이 언제나 사실 그대로 기록되고 올바로 해석돼 왔다고 볼 수는 없어쉽게 말해난 카인이 엄청난 사람이었다고 생각해단지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지어냈을지도 몰라카인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가볍게 떠들어 대는 터무니없는 소문에 불과한 거지하지만 정말 카인과 그 자손들이 표적을 지니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다는 것만은 진실이라고 생각해.”


<데미안>이 주는 의미는 성장을 위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선한 세계와 악한 세계를 모두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세계를 흑과 백으로 양분할 수는 없다. 그리고 하나의 세계에서 머물 수도 없다.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의 변증법 도식 중 하나인 정반합(正反合) 논리처럼 우리는 두 세계의 경험을 통해 비로소 자신 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어느 한쪽에 발을 더 많이 두고 있느냐의 차이일 뿐, 우리는 흰색이나 검은색으로만 존재하진 않는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정답은 없다고 본다. 선하게 사는 것은 항상 옳은 것일까? 아니면 악하다는 것은 전부 나쁜 것일까? 이는 사회가 만들어지고 규율과 규정, 그리고 법규가 만들어 짐과 동시에 내규와 관습, 관념에 의해 정의 내려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국가에서 적용되는 선함이 다른 국가에서는 악함으로 정의될 수도 있다. 또한 한 개인에게 베푼 관용이나 배려가, 그 당사자에게는 억압과 무시로 비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것은 사회가 정한 기준이 아닌, 내 안의 나 즉, 내면의 자신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 더불어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느냐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누군가가 ‘이건 선한 것이니 이렇게 해야 돼’, 혹은 ‘저렇게 하는 것은 나쁜 행동이야’ 말한다 할지라도 거기에 대해 판단 내리는 것은 결국 온전히 나의 몫이라 할 수 있다.


그 누구도 아닌 나,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살고자 하는 방향은 어디인가? 그것이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나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에 어느 정도 답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우리는 <데미안>의 이 구절대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알은 세계다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새는 신에게 날아간다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차칸양

"경제·경영·인문적 삶의 균형을 잡아드립니다"

- 재무 컨설팅, 강의 및 칼럼 기고 문의 : bang1999@daum.net

- 차칸양 아지트 : 에코라이후(http://cafe.naver.com/ecolifuu) - - 목마른 어른들의 배움&놀이터


매거진의 이전글 애니깽이란 단어가 전하는 참을 수 없는 인생의 무거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