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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칸양 May 25. 2020

밥벌이, 부부, 아내, 딸, 친구, 어머니 그리고 공부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정재찬 지음)>을 읽고


정재찬 교수님의 신작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을 읽고난 뒤, 제 마음에 다가서는 시 몇 편을 추려 필사를 해 보았습니다. 시만 나열하다보니 조금 감성에 와 닿지 않네요. 그래서 중간중간 제 나름대로 살을 붙여 보았습니다. 그러니 조금 더 읽기가 나아 보이네요. 좋은 시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는 걸까요, 아니면 먹기 위해 사는 걸까요? 당연히 전자라 말하고 싶겠지만, 생물학적으로 판단한다면 후자도 틀린 말이라 보긴 어렵습니다. 그래서 삶은 어쩌면 밥벌이의 연장선이라고도 할 수 있죠. 밥벌이라 하면 먼저 고달픔, 외로움이 연상됩니다. 더군다나 밥벌이를 위해 가족이 모두 흩어져서 생활한다면 더 말할나위도 없겠죠? 다음 시처럼 말이죠.



유랑

                  박성우     


백일도 안된 어린 것을 밥알처럼 떼어 처가로 보냈다

아내는 서울 금천구 은행나무 골목에서 밥벌이한다

가장인 나는 전라도 전주 경기전 뒷길에서 밥벌이한다

한 주일 두 주일 만에 만나 뜨겁고 진 밥알처럼 엉켜붙어 잔다


                      - <자두나무 정류장>(창비, 2012)



그렇게 밥벌이에 매몰되다보니 부부가, 가족이 소원해집니다. 특히 아내에 대한 마음이 무뎌집니다. 이러려고 결혼한 건 아닌데.. 나이가 든 아내에게도 파릇파릇한 젊음이 있었습니다. 그 청춘이 저를 만나 빛을 바래고 말았군요...



내 마음에 별이 뜨지 않은 날들이 참 오래 되었다

                                                                                 주용일     


별밤, 아내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한다. 그녀도 처음에는 저 별들처럼 얼마나 신비롭고 빛나는 존재였던가. 오늘 저녁 아내는 내 등에 붙은 파리를 보며 파리는 업어주고 자기는 업어주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린다. 연애시절엔 아내를 많이도 업어주었다. 그때는 아내도 지금처럼 무겁지 않았다. 삶이 힘겨운 만큼 아내도 조금씩 무거워지며 나는 등에서 자꾸 아내를 내려놓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가을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나는 내 마음속에서 뜨고 지던 별이며 노래들을 생각한다. 사랑, 평등, 신, 자유, 고귀함 이런 단어들이 내 가슴에서 떴다 사위어가는 동안 내 머리는 벗겨지고 나는 티끌처럼 작아졌다. 새들의 지저귐처럼 내 마음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노래가 일어났다 사라지는 동안 내 영혼은 조금씩 은하수 저쪽으로 흘러갔다.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것들을 생각한다. 이루지 못한 꿈들이며, 가엾고 지친 영혼이며, 닳아버린 목숨이며, 애초에는 없던 가족, 집과 자동차, 보험금, 명예 이런 것들이 별이 뜨고 지던, 노래가 생겨나던 마음을 채워버렸다. 별이 뜨지 않는 밤하늘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노래가 없는 생을 한 번도 떠올려 보지 않았는데 그런 날들이 참 오래되었다.     


                      - <내 마음에 별이 뜨지 않은 날들이 참 오래 되었다>(오르페, 2016)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기 싫어, 혹은 하지 못해 그런 건 아닙니다. 어쩌면 마음 속으로 수백, 수천 번 이상 했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입밖으로 내지 않았던 이유가 있습니다. 사랑에도 발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저의 사랑은 삶의 모든 과정을 진국처럼 진하게, 그리고 오랜 시간을 뜨겁게 함께 보내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꺼낼 수 있는 그런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아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있는 만큼 그대의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 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은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 <게눈 속의 연꽃>(문학과 지성사, 1990)



그럼에도 부부 사이에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끈적함이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도구로도 끊어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어 있죠. 어찌보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정말 사소해 보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이러한 연결이 부부를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하도록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부부 사이, 미스테리 그 자체입니다. 환상 혹은 기적이라 표현해도 되겠네요.



부부

                  문정희     


부부란 여름날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도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만 한 연고를

손 끝에 들고 나머지를 어디다 바를까 주저하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함께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 보는 사이이다     


서로를 묶는 것이 거미줄인지

쇠사슬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부부란 서로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오도 가도 못한 채

죄 없는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 <다산의 처녀>(민음사, 2010)



딸이 하나 있습니다. 자식을 키워보니 원하는 것이 많아집니다. 공부도 잘 했으면 싶고요. 하지만 이제는 딱 하나만 바랍니다. 그저 세상에 대해, 사람에 대해 관찰만 잘 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의 이익만 바라지 않고 보다 넓은 마음으로 관찰을 잘 하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딸을 위한 시

                  마종하     


한 시인이 어린 딸에게 말했다

착한 사람도, 공부 잘하는 사람도 다 말고

관찰을 잘 하는 사람이 되라고.

겨울 창가의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

사람들은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

오늘은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안 싸온 아이가 누구인지 살펴서

함께 나누어 먹으라고.     


                      - <활주로가 있는 밤>(문학동네, 1992)          



동네에 불알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의 집은 마당이 넓었지요. 나무도 많았습니다. 봄이 되면 꽃이 만발했던 그 마당에서 자주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스무 살이 넘어가며 만남이 줄었습니다. 당연히 그 집을 가본 지도 꽤나 오래 되었고요. 그러던 중 오랜만에 그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희덕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 <어두워진다는 것>(창비, 2001)          



집안이 엉망입니다. 정리를 해도 짐은 계속 불어납니다. 더군다나 어머님을 모시고 살다보니 짐은 더욱 많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를 정도로 꽤나 오래된 볼품없는 것들. 더 이상 사용할 수도 없는 효용성 없는 것들. 하지만 어머님은 모든 물건에 추억이 담겨 있다며 손도 못대게 합니다. 돌아가시면 싸가지도 못할 것들에 왜 그리 애착을 보이시는지...          



입춘

                  배한봉     


암 수술로 위를 떼어낸 어머니

집에 돌아오자 제일 먼저

세간을 하나둘씩 정리했다.

아팠다. 나는

어머니가 무엇인가를 하나씩 버리는 것이 아파서

자꾸 하늘만 쳐다보았다.

파랗게, 새파랗게 깊기한 한 우물 같은 하늘이 한꺼번에 쏟아질 것 같았다.

나는 눈물도 못 흘리게 목구멍 틀어막는 짜증을 내뱉었다.

낡았으나 정갈한 세간이었다.

서러운 것들이 막막하게 하나씩 둘씩 집을 떠나는 봄날이었다.

막막이란 말이

얼마나 막막한 것인지, 그 막막한 깊이의 우물을 퍼 올리는 봄날이었다.

그 우물로 지은 밥 담던

방짜 놋그릇 한 벌을 내게 물려주던 봄날이었다.

열여덟 살 새색시가 품고 온 놋그릇이

쟁쟁 울던 봄날이었다.     


                      - <주남지의 새들>(천년의 시작, 2017)          



공부하기를 싫어했습니다. 학창시절 그 지긋지긋하던 공부. 그래서 사회에 나온 이후로는 공부에서 손을 떼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보니 공부란 꼭 지식을 습득하는 것만이 아니더군요.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삶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이 공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부에는 끝이 없다고 했나 봅니다.          



공부

                  김사인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 책상 앞에 무릎 꿇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필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 <어린 당나귀 곁에서>(창비, 2015)                      


   



차칸양

"경제·경영·인문적 삶의 균형을 잡아드립니다"

- 재무 컨설팅, 강의 및 칼럼 기고 문의 : bang1999@daum.net

- 에코라이후(http://cafe.naver.com/ecolifuu) - - 목마른 어른들의 배움&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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